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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언내츄럴 : 부조리한 죽음

참고 : 일드 ‘언내츄럴’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언내츄럴’은 사인 규명에 특화된 연구소를 배경으로 ‘부자연스러운 죽음’ 이면의 진실을 쫒는 법의학자들의 고군분투를 담은 드라마다. 경찰에서 의뢰하는 시신을 주로 부검하는 이 연구소에는 이따금씩 일반인 유가족이 찾아온다. 직장생활을 하던 아들의 갑작스런 돌연사를 받아들일 수 없는 부모. 가장이었던 남편의 죽음 이후 남겨진 아내와 아이들. 연인의 자살을 납득할 수 없어 찾아온 남자. 이 중 남자는 장례 준비 중이던 연인의 시신을 훔쳐서 부검 의뢰를 한다. 시신을 훔치면서까지 그가 원했던 것은 “저는 진실을 알고 싶습니다”라는 대사를 통해 드러난다. 유가족들은 필사적으로 진실을 쫓는다. 자식이, 남편이, 연인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로 죽었기 때문이다.

언내츄럴 데스. 극 중 ‘부자연스러운 죽음’의 다른 말은 ‘부조리한 죽음’이다. 5화에서 남자 주인공은 ‘자살로 위장한 타살’이 의심되는 여성(시신을 훔친 남자의 연인)의 사인을 밝히기 위해 경찰 몰래 증거가 될 수 있는 폐를 빼돌린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여주인공이 이유를 설명하라고 다그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생각해봤어? 영원히 답이 안 나오는 질문을 반복하는 인생. 지금 찾지 않으면 두 번 다시 이 사람이 죽은 이유를 알 수 없게 돼. 그런 사람을 한 명이라도 더 줄이는 게 법의학이 해야 할 일 아닐까.” ‘영원한 질문’이라는 테마는 같은 화에서 한 번 더 반복된다. “미제사건 유족들에게는 끝이 없어. 소중한 사람이 왜 죽었는지 모르는 채 영원히 이유를 생각해야만 하지.”

 

누군가의 고통을 그 사람처럼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 대사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고유한 고통을 똑같이 공유할 수는 없어도, ‘영원한 질문을 평생 안고 살아가는 상태’를 공동체 구성원들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지금 이 사회에 너무나 필요하다고. 유경근 씨가 했던 ‘(유가족들의) 치유와 회복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말은 고통을 절대화하고 절망을 영속하는 선언이 아니라, 중단이 불가능한 질문을 멈추라고 강요하는 사회에 대한 저항이라고.

 

2.

 

왜 죽었는가. 유족들의 끝없는 질문에 두 주인공은 끝까지 응답하기 위해 노력한다.

 

가령 자살 사이트 회원들이 집단 자살한 사건에서 스무 살 남짓한 한 여성의 사인이 동사로 밝혀진다. 동사로 살해된 후 자살로 죽은 다른 시신들 틈에 위장된 것이다. 그러나 경찰은 여성의 사건을 수사하는 대신 신원불명으로 송치하려 한다. 여주인공은 기관 상급자에게 “타살 의혹이 있다는 증거 자료를 경찰 측에 보냈다”고 항변한다. 그러자 상급자는 이렇게 답한다.

 

“못 본 걸로 한 게 아닐까? (사건이 일어난) 집 주인은 사건을 빨리 마무리 짓고 싶어 하고, 피해자는 친인척이 없는데다 평소 죽고 싶어 했다는 증언이 나왔어. 경찰은 중대 사건이 산더미라 못 본 걸로 하면 원만히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

 

이 드라마는 각자의 이유로 죽음을 덮고자 하는 사회 군상들의 면면을 묘사하는 데에도 공을 들인다. 언내츄럴에 등장하는 경찰들은 매번 자살이나 사고사로 사건을 축소하고 싶어한다. 검찰은 실적을 위해 위증을 강요하는 등 강압적이다. 비중 있게 등장하는 유일한 언론사는 가십전문지로 ‘팔아치울 수 있는 그림’에 연연한다. 가족을 남기고 죽은 아버지의 에피소드에서 고인은 근무 중 다쳤음에도 매일 초과근무 체제로 돌아가는 공장에 휴가를 내지 못 해 죽는다. 그러나 공장은 보상금을 물지 않기 위해 끈질기게 이 사실을 숨긴다.

 

주인공들은 사망자의 시신에서 진짜 사인을 찾아낸다. 그러나 죽음의 진실을 찾는 일은 단순히 ‘사인’을 찾는데서 멈추지 않는다. 이들은 고인이 몸으로 남긴 증언을 끝까지 듣고, 죽음의 과정에 엮여있는 거미줄 같은 인과의 선들, 즉 사회적 진실을 불러낸다.

 

‘부자연스러운 죽음’의 진실은 그이들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 엉망진창의 세계와 맞닿을 수밖에 없다. 나는 그런 세상에 같이 몸담고 살고 있다. 세월호 5주기. 이젠 슬픔의 무게에 짓눌리고 위축 되는 대신, ‘같이 질문하는 역할’을 되새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