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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낭비하며 쌓인 먼지를 털러 떠납니다

낭비하며 쌓인 먼지를 털러 떠납니다.
명숙(상임활동가)

사람이 살다보면 몸에, 마음에 묵은 때와 같이 무언가가 켜켜이 쌓이게 됩니다. 그래서 힘이 들기도 하고, 또는 힘이 들지 않아도 무언가 막히는 것들이 생기지요. 아마 생활하거나 활동하거나 움직이면서 부스러기를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 부스러기들이 활동이나 관계를 삐끄덕 거리게도 하고, 심지어 움직이지도 못하게 할 때도 있습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생존하는 모든 것들이 비슷하겠지요. 그래서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에게는 안식년이 주어집니다. 좀 쉬면서 그 때들을, 그 먼지들을 털어내서 조금은 상큼하고, 조금은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다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시간’이 주어집니다.

오늘은 제가 안식년을 떠나기 전날입니다. 아직 안식년으로 주어진 1년간 무엇을 할지는 정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도 밤까지 야근할 거 같습니다. 그래도 내일부터 안식년이라는 사실이 저를 덜 무겁게 하네요. 그래도 두 가지 계획은 있습니다.

하나는 바로 낭비하는 시간을 만들기입니다. 누군가는 저의 이 이야기를 들고 낭비도 계획으로 하는 경우가 있냐며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모범생(^^)으로 살아온 제게는 마음먹지 않으면 쉽지 않은 일이 낭비입니다. (사실 자본주의가 시간의 낭비를 경원시하게 만들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전 그동안 참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에 익숙한 인간이었던 듯합니다.) 10년 전에 느긋하게 살아본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 후부터 최근까지 계획하거나 규칙적인 것에, 활동에 천착하며 살아왔기에 당분간은 다른 방식으로 살아보려 합니다. 느슨해지면 물리적 시간과 함께 마음의 공간도 열리니까 조금은 털 팍팍하게 살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그 공간에 상상력이 들어올 여지도 생기고 마음의 잔근육도 얼굴의 주름살만큼이나 생길 수 있으니, 훨씬 더 활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요. 덤으로 꿈에 그리던 연애도 하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사랑에 빠질 시간을 만들어 볼 요량이니까요. 그리고 방치된 일상생활도 조금 정리하려고 합니다. 아직도 제 책방에는 문서와 책들이 뒤엉켜 있거든요. 책도 정리하며 마음도 생각도 정리하고... 차분하게 책도 읽고 글도 쓰려구 해요. 복구된 일상이 저에게 따분함을 줄 때까지 말입니다. 일상과 비일상을 나눈다는 것이 어쩌면 부질없는 짓처럼 보일수도 있지만 가끔 사라진 일상에서 ‘나’도 사라진 것은 아닐지 걱정하며 목을 숙였던 적이 많아서인지 일상에 대한 갈증이 생겼다고나 할까요. 집에서 밥을 해먹은 기억이 참 오래되었거든요. 물론 꼬박꼬박 집에서 밥을 해먹겠다는 건 아닙니다. 낭비란 ‘생각날 때’, ‘마음 내키는 대로’가 모토이니까요.


그리고 다음 계획은 악기를 배우는 일입니다. 사실 저는 음치에 박치에 음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음악을 듣고 몸을 흔드는 것을 좋아하는 지라, 악기를 하나라도 익힌다면 제 삶이 풍요로워지고, 주변 사람들도 즐겁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일단 쉬운 악기부터 천천히 배울 계획입니다. 1년이면 악기 하나는 익힐 수 있지 않을까요. 안식년이 끝나고 악기하나 할 줄 알면, 그 정도면 충분한 안식년이지 않을까 싶네요.

물론 이렇게 들떠 있으면서도 주변 활동가들이나 후원인들, 친구들, 안식년이 없는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평생 한 달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는 현장에서 노동운동하는 그녀가 새침하게 저를 부러워하는 모습을 접하고는 미안하기도 하고 부끄러워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잘 쉬다가 오려고 합니다. 물론 쉰다고 아예 얼굴도 세상에 안 비치며 세상을 등지지는 않을 계획입니다. 사회 속의 인간이 어찌 세상을 등지겠습니까. 다만 좀 자유롭게 세상에 힘을 보태겠지요. 그동안의 방식과는 다르게요. 조금 천천히 다르게... 물론 9월에 있을 사랑방 창립 20주년 행사도 참여하구요.

사랑방 활동가 여러분, 후원인 여러분! 건강하게 잘 다녀올 테니 제가 부디 두 가지 계획을 잘 이루고 오길 기원해주세요. 그리고 제가 다시 사랑방에 돌아올 때까지 남은 사랑방 활동가들을 열심히 지지해주세요.


2013. 7. 31.
명숙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