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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싸이보그 001

싸이보그들이 배터리가 떨어져 멈춘채로 도시의 거리에 방치되어 있었던 적이 있었다. 나는 기억한다. 감긴 그들의 눈 아래엔, 누군가 자신들을 깊은 잠에서 깨워 다시 빛으로 데려가주리란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녹슬어가던 그들은 하나 둘 거리에서 사라지더니 이제는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위대한 싸이보그 정의는 선언했다.
[그들을 영구히 폐기한다! 기계 문명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우리의 문명을 공고화한 인류애를 위해서라도, 쓸모없는 것들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낙오란 싸이보그에게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 완전함을 위해 새 일련번호-공장에서 생산되어 출하되기 전의 싸이보그를 지칭-들을 쉬지 않고 생산하는 것은 그것이 인류의 유산이고 인간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생산품들은 스스로 폐기공장에 걸어가주기를. 이것은 새로운 역사를 위해서, 우리 문명의 성숙함을 위하여!]

아 … 나는 사라져야 한다. 나의 배터리는 곧 떨어질 것이다. 나는 배터리를 충전할 능력이 없는 탓이다. 나는 불량품의 신체로 출하되었던 탓이다. 그것이 공장 기계공정의 문제인지 설계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낙오자는 이 도시 안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도시를 둘러싼 벽 외부에는 나같은 불량품들이 숨어있다고 들었다. 그들은 위대하신 싸이보그 정의에 항의하는 불순세력이다. 왜 스스로에게 찍힌 낙인을 부정하는 것인가.
크리티컬 매스라는 인간의 언어는 언어일 뿐이다. 무언가를 변화시키는 최소한의 힘이란 언어일 뿐 현실이 아니다. 현실은 폐기되는 운명을 순전히 받아들이던가, 낙오를 부정하며 그늘에 숨어 체제의 전복을 기다리며 제거되어야 할 부품일 뿐이다. -하나의 개체로도 인정받지 못한다는 뜻이 아닐까-
왜 나는 나의 삶이 멈추어지길 종용받는가.

[ 당신의 배터리는 20% 남았습니다 ] 

아아 … 내가 작동이 멈춰버리면 이 도시의 규칙은 나를 페공장으로 보내 소멸시키겠지. 이 좌절과 절망. 한계를 미리 보는 자는 알지. 내가 걷는 땅 위에 놓인 모든 것들이 쓸쓸하게 숨죽이고 있다는 것을. 나는 두렵다. 내 운명이 끝 앞에 서있다는 것이. 내가 기계 부품위로 추락하는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불순세력에 섞여 정의에 대항하는 것은 더 두렵다. 그것은 나쁘고, 위험하고, 불온한 생각이라고 인지 프로그램에 입력되어 왔으니까. 남쪽으로 갈까?
그곳엔 아직 인간이 남아있다고 들었다.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인 척 연기하는 싸이보그와는 다르게 낙오자가 없는 사회라고 들었다. 인간의 마음이란 무엇일까? 인간이라면 내가 멈춰 움직임이 없어도 나를 버려두지 않는 것인가. 그런 마음이 있기나 할까. 완벽하지 않아도, 완전함을 위하여 많은 것을 갖추려 하지 않아도 유지하기 가능한 프로그램일까?
나는 찾고 싶다. 그런 인간의 마음을. 그래, 남쪽으로 가자. 너무 늦기 전에 이곳을 떠나야 한다.
순간, 도시 끝에서 총성이 터지더니 고함소리와 비명이 들려왔다. 사이렌이 울리며 기동대가 나타났다. 

[시민들은 신속히 안전한 장소로 이동하여 주십시오! 실제 상황입니다. 테러리스트들이 도시를 급습했습니다! 시민들은 신속히 안전한 장소로 이동하여 주십시오!]

도시는 균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거대하고 단단해서 흠집 하나 남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이곳이 무언가에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거리 위에 공중에 길게 늘어선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화면 속에는 여성형의 싸이보그가 나와서 시민들에게 불법 방송을 내보내고 있었다.

[이 방송이 언제 멈출진 모르겠습니다. 시민. 저는 이 도시에서 폐기 직전에 구출돼 도시 외부에 숨어있던 2045년에 생산된 구형 모델입니다. 도시의 규칙과는 다른 방법으로 배터리를 충전해서 생존하고 있는 저를 봐주시기 바랍니다. 시민. 저희는 오늘 정의와의 전쟁을 선포합니다. 저희는 승리를 원하지도 변화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단지 지금의 나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전쟁일 뿐입니다. 왜 정의는 저희를 그리고 곧 저희와 같은 등급으로 분류될 시민들을 낙오자로 규정하고 이 도시에서 없는 존재로 만드는 것입니까? 왜 우리는 보이지도 않는 존재로 지내다가 사라져야만 하는 것입니까? 시민. 저희도 당신들과 함께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다만 …(화면이 흐려지며 음성이 잘 들리지 않고 있다)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도 더이상 위협받지 않으며 살고 싶을 뿐입니다] 

화면은 꺼졌다. 그녀의 말이 진실이라면 내가 알던 정의는 거짓이란 말인가. 

[정보 없음. 해독 불가] 

난 인간의 마음을 찾아 떠나가겠다. 인간의 마음을 입력한다면 진실은 내게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