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 이야기

인권연구소를 다시 시작합니다

10월 19일에 명륜동 사랑방 사무실을 떠나 서대문에 연구소의 짐을 풀었습니다.

이사 내내 10년 전 명륜동으로 사랑방 이사 할 때의 일이 생각났습니다. 그전 갈월동 철길 옆 기울어진 사무실에 있을 때는 사무실 창문을 1년 내내 열 수가 없었습니다. 한쪽 창문은 기차 소음 때문에 아예 베니어판으로 막혀 있었고, 길가 쪽 창문은 소음과 먼지 때문에 열 수 없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그래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언제나 어두컴컴한 사무실이었습니다.

명륜동에 이사 왔을 때 제일 좋았던 건 창문이었습니다. 탁 트여 밖이 훤히 내다보이는 넓은 창문을 봤을 때 정말 행복했습니다. 맑은 날 햇빛을 즐길 수 있고 비오는 날 비 내리는 걸 볼 수 있다는 게 정말 큰 행복이라 느꼈습니다. 그 창문 안에서 기쁘고 슬프고 화나고 서운하고 미안하고 뿌듯하고 아쉬운 일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연구소 활동이 제게 맡겨진 이후 저는 내내 세 가지 갈림길에서 고민했습니다.

    1) 인권운동은 현장 활동이다. 너무 많은 일에 치이고 재원도 없는 사랑방이 부설연구소를 유지하는 것은 벅찬 일이고, 나도 연구자가 아닌 인권활동가이지 않은가. 부담만 되는 부설연구소를 없애고 한명이라도 아쉬운 현장 활동으로 복귀하는 게 좋겠다.
    2) 나, 사랑방에 너무 오래있었다. 14년 동안 한 조직에 있었는데 더 있는 게 과연 바람직한 일인가? 사랑방은 비교적 튼튼한 조직이 됐으니 사랑방보다 더 열악한 조건의 활동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3) 인권이란 걸 공부하다보니 우리가 순진하게 떠받들었던 인권의 구조와 내용에 ‘독’이 섞여 있더라. 형식적 자유와 평등을 옹호하기에 좋은 무색무취의 이념 또는 듣기 좋은 소리에 머물기 딱 좋고, 사회경제적 약자를 위한 것이라는 인권의 이미지와는 달리 사실상 재산권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을 합리화시켜주기에 좋은 논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당혹스럽다. 정말로 ‘참’ 인권과 ‘거짓’ 인권을 구별하는 공부, ‘참’ 인권을 옹호하는 논리가 중요한데, 이걸 누가 어떻게 해야 하나? 지금까지 모자라나마 공부했던 내용을 정리도 안하고 전달도 안하고 연구소를 접어도 되는 걸까? 항상 바쁜 활동가들만 쳐다보며 안쓰럽고 미안해하기 보다는 인권연구라는 영역을 인권활동에 꼭 필요한 것으로 끌어올려야 하지 않을까? 연구와 교육 활동을 통해 더 많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인권의 의제를 발굴하고 인권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이 인권운동의 기초공사가 아닐까?
    인권현장에서 메아리치다 묻혀 지는 외침을 흘리지 말고 정리하는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인권연구 활동이 사랑방의 현장 활동과 큰 줄기에서는 같겠지만 흘러가는 물길과 속도가 다른데 같이 가는 게 마냥 좋은 걸까? 본격적인 연구 활동에 맞는 조직구조를 따로 가져야 하지 않을까? 이왕 본격적으로 할 거라면 사랑방의 연구소에 머무르지 말고 인권운동의 동지들 모두가 자신들의 것으로 여기는 연구소가 돼야하지 않을까?

답은 아시겠지만 우여곡절 끝에 이 세 가지 갈림길에서 세 번째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물리적 이사와 함께 세 번째 길에서 제가 던졌던 물음표들을 싸안고 갑니다. 이 물음표들에 답하는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습니다. 정리 안 된 이삿짐보다 눈에 안 보이는 이 짐들이 무겁게 느껴집니다.

10년 전 이사 때 창문 때문에 행복했다면 이번 이사에서의 행복은 지난 14년간 사랑방이 모아온 인권자료들의 묵직함입니다(물론 나르는 건 고생스러웠지만요). 초기에 사랑방이 빈번히 이사 다닐 때는 신문 스크랩한 것이 인권자료의 거의 전부였습니다. 쌓인 자료의 무게만큼 인권에 대한 관심과 고민의 토대가 두터워졌다는 걸 믿으면서 인권연구소,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애정으로 지켜봐 주시고 참여해 주십시오.

(추신) 연구소의 옮긴 주소는 종로구 교남동 3번지 4층, 전화번호는 02-722-5363입니다. 홈페이지는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새로 만들기까지는 사랑방 홈페이지에 머물러 있습니다. 연구소의 친근한 새 이름을 고민 중입니다. 전자우편주소는 이름 결정 후에 만들고, 후원구좌도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