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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대추리가 던지는 고민

얼마 전 대추리에 사시는 주민대책위 사무국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약간의 한숨이 묻어 나는 목소리로 “요즘 (대추리)촛불행사에서 어르신들 앞에서 서는 게 너무 민망하다”며 촛불행사에서 틀만한 좋은 영화 있으면 좀 부탁한다는 거였다. 김지태 이장의 선고공판을 목전에 두고 있었던 때였고, 도두리 주민들이 이주를 결정하고 촛불에도 발을 끊은 때. 외부인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대추리에서 ‘남아 있는 자’들의 막막함과 초조함 그리고 고립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바였다. 문제는 미리 예상할 수 있는 위기가 사실은 ‘그들만’의 위기로 굳어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너무 슬픈 건 말고, 재미있거나 힘이 나는 그런 걸로 좀 갖다줘요.” 사무국장의 요청을 되새기며 고른 영화는 <맨발의 기봉이>. 솔직히 고백하면 인권영화는 자막이 많을 뿐더러, 잠깐 동안이라도 ‘웃고 즐길 수 있는 오락’을 선택하는 게 옳을 듯해서였다. 인권영화제 프로그래머로서 부끄러운 일인가? 그런 반성이 스멸 스멸 기어나오면서도 이번엔 재미있게 가자로 결정했다.

“아이구 언제왔어? 밥 먹었어? 이리로 앉아” 마치 반가운 손녀가 온 것처럼 여기 저기서 할머니들의 환대가 쏟아진다. 고맙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자주 못 찾아와서 정말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이장님은 이번에 꼭 석방되실 거다는 전혀 책임질 수 없는 다짐을 늘어놓으며 영화를 틀었다. 장애인인 기봉이가 팔순의 노모와 함께 나름 행복하게 살다가 마라톤대회에 나가 완주하는 것이 클라이막스인 영화는 예상대로 주민들에게 기쁨을 주었다. 주민대책위가 준비한 강냉이를 먹으면서 비록 작은 스크린과 불편한 자리였지만 많은 분들이 끝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기봉이와 노모가 살아가는 삶의 소소한 재미에 연신 폭소를 터뜨렸다.

“아이구 오늘 정아 씨가 아주 좋은 영화를 가져왔다며?” 촛불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한밤중까지 벼베기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는 주민대책위 조직 국장의 너스레에 다시 한번 미안함이 번진다. 대추리에서 활동은 여러모로 어려움이 있다. 지난 8월 있었던 <평화촌 건설 프로젝트 여름나기>를 통해 대중 속에서 대중과 함께 활동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속 앓이가 꽤 있었다. 농촌 공동체 문화와의 이질성, 이런 예상할 수 있는 차이는 사실 별 문제가 아니다. 3년 넘게 이어지는 싸움 속에서 주민들에게 켜켜이 쌓여 있는 상처는 인권활동가들에게 풀기 힘든 문제로 되받아쳐 돌아올 때가 종종 있다. 안타까움과 고약함이 뒤범벅되어 “아 나는 정말 현장에서 무기력 하구나”를 되뇌일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재미있는 영화 틀어줘서 고맙다는 칭찬 속에 왜 이렇게 우리를 내버려 두고, 아무것도 안하느냐는 섭섭함이 어른거린다. 어려운 문제를 풀고 있는 수업 시간에 갑자기 선생님이 나를 불러 일으켜 정답을 말하라고 했을 때, 답을 얘기하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김지태 이장은 나의 예상을 비웃고 실형을 2년이나 선고받았다. 정부는 도두리 주민들 빼가기에 성공하고 사업을 예정대로 추진 중이다.
국가인권위의 권고가 있었지만 불심검문과 통행제한은 여전하다. 철조망 안에 갇혀 신음하고 있는 누런 벼이삭들처럼(정부가 ‘불법영농행위’라고 금지시키는 철조망 안의 수확량이 50억이라고 한다. 게다가 올해는 농사도 잘 되었나고 하니....) 주민들의 삶도 갈수록 신음소리가 잦아질 것이 눈에 보인다. 주민들의 고통이 나에게도 동일한 무게의 고통이 아니라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인권활동가에게 놓인 고민은 이러한 현실을 관통하면서 주민과 활동가가 함께 신뢰를 잃지 않고, 신념을 공유하면서 운동하는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