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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옆에서 함께 걷다보면

사랑방 사람과 신나게 바닷바람을 쐬고 돌아오던 길, 버스 안에서 뉴스를 들었다. 영등포역 방화셔터에 깔려 노숙인 두 분이 돌아가셨다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죽음의 소식.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당장 연락해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차마 전화를 걸 수 없었다. 노숙은... 거리에서 죽어가는 것임을 여태 몰랐던 것도 아니고 올해만도 한 두 분이 아니었다. 그 중 한 두 분의 죽음이라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도 못했고 무엇보다도 끝까지 싸울 수 있을지 자신이 없기도 했다.

뉴스를 듣자마자 주거인권학교를 함께 했던 노숙당사자모임 아저씨들이 궁금해졌다. 이 소식을 듣고, 어쩌면 공공역사의 텔레비전을 통해서 뉴스를 보고, 아저씨들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인간답게 살 권리. 먹고 자고 씻는 것은 최소한의 권리라기보다는 출발점일 뿐이다. 그러나 아저씨들에게는 그 자리가 최대한이거나 목적지이기도 했다.
노숙을 하다보면 잘 씻지 못하고 누가 먹던 음식인지도 모르지만 손이 갈 때가 있고 건물의 처마 밑이 '쪽팔려서' 잠이 안 오던 시절도 잠깐일 뿐이라고,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끝을 흐리던 아저씨들. 하지만 **역 ##교회 화장실에 가면 샤워시설도 돼있고 %시쯤 가면 편안하게 씻고 나올 수 있다고, $$에서 하는 결혼식 뷔페 같은 거 끝나면 배불리 먹을 수 있다고, 장충동 @@ 족발 집에 가면 아예 노숙인들 주려고 파전 싸놓기도 한다고, ~~에 가면 조용하게 자다가 나올 수 있다고, 어느새 떠들썩한 자랑이 시작되기도 했다.
부끄러움과 무용담의 경계에서 삶이, 인권이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인권침해당사자들의 투쟁이 중요하다고 늘 강조하지만 당사자들과 만나 관계를 맺고 조금씩 활동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인권단체 활동가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길은 아득하기만 하다. 집이 인권이라고 부르짖는다고 집이 당장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노숙당사자모임 아저씨들과 인권에 대해 말하면서도 당장 일자리가 없고 편안하게 몸 뉠 공간이 없는 사람들에게 인권이 사치스러운 말처럼 들리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떠나지를 않았다. 그렇다고 당장 필요한 서비스들을 제공하는 것이 인권운동사랑방이 고민하는 사회권운동의 방향도 아닌 듯했다. 그 경계의 어딘가에서 인권운동도 줄타기를 하는 셈이다.

그 아저씨들을 10월 17일 서울역에서 만났다. 한산한 아침 9시, 벌써부터 한 분이 나와 서성이고 계셨다. 사람들이 모두 모인 후 우리는 구 서울역사 옆의 미군여행장병안내소의 잠긴 문을 망치로 열었다. 비어있는 건물을 SOS 센터로 만들라는 요구와 함께. 주거인권학교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아 개근상을 받은 아저씨도 나오셨다. 여전히 졸려서 미치겠다고 투덜거리셨지만 늘 그렇듯 먼저 자리를 뜨는 법은 없는 아저씨다. 그리고 주거인권학교 때 뵙지 못했던, 새로운 노숙당사자모임 분들도 있었다. 우리가 점거한 미군여행장병안내소의 바깥 담에는 노숙당사자모임 아저씨들이 준비해온 선전물이 줄지어 걸렸다.

    “불공평하게 산다는 것쯤 내 못난 탓으로 돌려온 세월이었지만 마지막으로 보내는 동료의 모습이 손수레 위의 짐짝이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영등포역에서 돌아가신 분들을 추모하기 위해 차린 분향소에서 신문지를 깔아놓고 절을 하는 노숙 동료들의 사진과 2005년 2월 서울역에서 돌아가신 후 손수레에 얹혀 끌려가던 노숙인의 사진 아래 적힌 글이었다. 언제 한 번 얼굴 마주하고 이야기 나눈 적도 없었을 사람들. 다만 거리에서 살아가고 죽어가는 사람들이라는 이유로 동료가 되고 동지가 되는 사람들. 그래서 그들은 거리를 버리지 않고 거리에 삶과 인간의 존엄을 세우기 위한 추모의 촛불을 들었던 것. 무엇보다도 집이 필요하지만 공공역사의 위기개입 기능을 요구할 수밖에 없는 것. 그 분들이 이제 분향소 앞에서 소주 한 잔 기울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몸을 움직여 빈 건물을 점거했다.

어쩌면 당사자들의 투쟁이 중요하다는 되뇌임이 활동가가 먼저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됐다. 이미 그들은 싸우고 있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투쟁이고 필요한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운동이 되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일은 옆에서 손 놓지 않고 함께 걸어가는 일이었을 뿐이다.
그런 마음으로, 계획에 없던 기사를 쓰기로 했다. 보도 자료를 보고 대강 둘러댔을 대다수 언론의 기사와는 다른, 서울역사 옆 미군여행장병안내소가 왜 취약계층을 위한 SOS 센터가 되어야 하는지, 빈곤당사자들의 점거가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를 써야 하고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욕심이 생겼다. 그것이 인권오름이 해야 할 일이고 주거인권학교를 했던 우리가 해야 할 일인 듯했다.
민선 씨가 기사를 쓰겠다고 했다. 기획에도 없던 기사이고 저녁 늦게서야 준비를 시작하는 기사가 술술 써질 리는 없다. 민선 씨가 열심히 쓰다가 넘기고 간 기사를 붙들고 밤을 지새웠고 ‘빈곤철폐의 날에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지금까지 쓴 기사 중 가장 뿌듯한 기사였다. 기사를 잘 썼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 써야 할 기사를 썼고 그 순간 나는 기자이기보다는 노숙당사자모임과 연대하는 인권활동가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기사가 나올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민선 씨다. 기사 초안이 없었더라면 자정이 넘은 시간에 기사를 쓸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자원활동가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역시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로서 살아가는 것이 행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

여성으로서, '나이 많은 아저씨'는 일단 반갑지 않고, 옷매무새가 흐트러져있으면 더욱 불안해지는 편견도 당장 버릴 수는 없고, 험악한 표정이라도 지으면 흠칫 움츠러드는 게 사실이지만, 움츠러든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까지 포기하지는 말자는 다짐을 다시금 해본다. 옆에서 함께 걷다보면 아득하기만 하던 길이 열릴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