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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행진으로 만난 ‘평화’

<사람사람>에 평화행진에 참여한 자원활동가의 글을 싣기로 했단다. 원고 청탁을 받고 20일 전 행진을 기억해서 쓰려니 쉽지 않다. 나의 글을 보고 흉볼 사람이 없다 생각하고 혹, 있다하더라도 그대로 받기로 하고 마음 편안하게 쓰기로 한다. 장황해도 이해해 주시길. 지금은 편히 쉬고 싶은 일요일 밤이니까!

지난 7월 5일부터 9일까지 미군기지 확장 예정부지인 평택 285만평의 부당함을 알리고, 반평화 오적 ‘청와대, 국방부, 정부, 미군, 검경’을 규탄하는 285리 평화행진이 있었다. 나는 285리 행진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고민했다. ‘행진, 할까 말까? 285리 만만치 않은데...’ 누구도 이 거리 놓고 고민을 했는데, 누구더라? 소설 동의보감의 주인공이다. 허준은 과거를 보러가던 중, 한양까지 약 260리를 남겨놓고 충청도 한 마을에서 덜컥 발목을 잡힌다. 병든 농민들이 허준에게 치료를 호소하자, 허준은 고심 끝에 나흘 반을 쪼개어, 이틀 반 동안 한양까지 쉬지 않고 걷기로 작정하고 남은 이틀 동안 마을에서 병들어 있는 가난한 농민들을 돌본다. 나는 허준 보다 좋은 신발과 기능성 운동복을 갖고 있고, 조선시대보다는 평탄한 도로 위를, 닷새간 동지들과 함께 행진한다고 하니 걱정할 게 없었다. 나는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는 허준 보다 더 가볍고 즐겁게 ‘평화’를 위해 ‘평택’으로 걸어서 행진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결국 시간을 요리조리 조정해도 닷새 내내 참가할 수는 없었다. 결국 사흘 동안 ‘부분 참가’하기로 했다.

[285리 평화행진] 첫날, 기자회견장인 청와대 앞 (구)합동청사 앞에서 행진단 참가 신청을 하고 행진단 티셔츠를 받아 입었다. 청와대 앞에서 시작하여 서울 역, 국방부, 동작대교, 사당역까지 대략 20km 걸었다. 위태로운 평택과 평화를 지키기 위한 힘찬 행진은 즐겁고 씩씩했다. 행진단은 노래와 구호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지지와 참여를 구했고, 동작대교 위에서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서로에게 웃음과 용기를 주었다.
평화행진단의 몸짓은 구김도 없고, 눈치도 없는 생명력 넘치는 ‘자연스러움과 평화’ 그 자체였다. 그 생명력은 오적의 주요 거점에 닿아서는 분노로 터졌다. 국방부 입구는 평택 스티커로 도배를 해야 했고, 평화메시지가 적힌 노란 띠를 주렁주렁 달아야 했다. 속이 조금 시원해졌다. 행진을 시작할 때 준비단이 나눠 준 호루라기를 힘껏 불며 평화행진단의 평화 의지를 귀에 못이 박히게 말해도 끝까지 무시하는 오적의 귓구멍을 향해 쏘아 박았다. 오적은 화석처럼 박힌 복종의 습관을 고집스럽게 자기의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넋이 나간 인간들이다.

화가 치밀어도 호루라기를 자주 또는 오래 불러 댈 수는 없었다. 목이 아파왔고, 머리끝에서 찌릿찌릿한 통증을 느꼈다. 정말로 평화행진단이 오적을 상대해 싸울 무기는 평화행진밖에 없었다. 개인적인 일로 2일차(7월 6일: 정부 종합청사에서 수원 역까지), 3일차(7월 7일: 수원에서 오산 역까지)에는 행진에 참여하지 못했고, 다시 행진단에 합류한 곳은 4일차인 7월 8일, 지제 역에서 였다.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행진단은 약 150명 정도를 유지하고 있었고 합류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서로 손을 맞잡고 흔들며 환호했다. 행진단은 모두 검게 그을렸고, 많이 지쳐보였다. 평택 역에 도착한 행진단은 청와대에서 평택까지 걸어 온 평화행진단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평택 시민들에게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를 호소했다. 평택의 미군기지 문제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 평택 시민을 만나면 솔직히 손등을 꼬집어 주고 싶었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미군에게 우리 땅을 빼앗긴다고요. 화도 안나요?’ 그러나 마음 뿐, 속만 터졌다. 다행히 더 많은 사람들이 수줍은 미소로 지지해 주었고, 박수와 구호로 반겼으며, 현금을 건네주며 격려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행진단에게 분명 큰 용기를 주었다. 평화행진단은 그날 밤 평택 역에서의 촛불문화제에서 평택 시민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으며 평택에 평화바람을 일으켰다. 희망찬 얼굴에 웃음이 넘쳐흘렀다. 그때까지는 좋았는데... 어두운 밤, 대추리로 이동하는 행진단은 원정 삼거리에서 폭력으로 평화행진을 저지하는 상인들의 횡포에 당하고 말았다. 행진단은 끝내 앞으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고, 단지 상인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상인을 자극하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라는 지침을 받았을 뿐이었다. 폭력 앞에 평화행진단은 침묵이 유일한 투쟁방법이었다. 누구는 ‘때리면 맞아라, 맞아서 폭력을 폭로하라’라고 외쳤다. ‘맞아서 폭력을 폭로하라고? 맞는 거 싫은데. 평화행진이라도 다음에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참가해야 하겠어! 무서워 죽겠잖아! 다쳐서 병원가면 골치 아파.’ 나는 그 위급한 상황에도 별별 생각을 다했다. 그 사이에 어떤 활동가는 상인들을 제지하려다 결국 폭행을 당했다. 그리고 진짜로 폭력 행위를 폭로하기 위해 자신의 상처를 찍어 사진자료로 모았다. 그들은 불법 연행되어 경찰에게 폭력을 당한 행진단들과 함께 고소를 준비하고 있다. 평화롭던 평화행진은 결국 겁 많은 경찰들의 폭력에 상처를 입었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40여명이 연행된 다음날 아침, 나는 평화행진단의 조직적이고 능동적인 모습에 감격했다. 평택 민주노동당 사무실 바닥에 자리를 깔고, 두어 시간 동안 마치 짐짝처럼 쓰러져 자던 행진단들은 정확한 시각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진행단의 행동지침에 따라 제각기 자기 일을 찾아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컴퓨터 앞에서는 언론사에 보낼 보도 자료를 작성했고, 전국 각지로 연행 사건을 알렸다. 컴퓨터가 부족한 몇 명은 온라인 선전전과 기사제보를 위해 피시방으로 이동했다. 부족한 필기도구로 간단명료하면서도 독창성이 돋보이는 선전물을 다양하게 만들었고, 일손이 남는 사람들은 종이를 오려주고, 부족한 매직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 주고, 음료수를 따라 주었다. 모두가 진지했고 조심스러웠다. 흔한 핸드폰 수다도 잡담도 없었다. 행진단은 거리 선전전과 평택 경찰서에 항의 방문을 한 후, 대추리 입구인 원정리 삼거리에서 마을사람들과 다시 만났고, 울분을 참지 못한 행진단들을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자기만족과 위안을 위해 행진에 참여했다며 주민들께 사과한다는 행진단의 솔직한 고백에 무거운 마음을 쓸어내렸다. 행진을 끝낸 평택지킴이들은 질긴 장맛비에도 매주 목요일이면 주저 없이 광화문 앞에서 집회를 한다. 평화의 폭풍우가 몰아치길 바라면서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