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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애매함'이라는 법칙 속에서 출발한 안식년

“애매함은 삶의 법칙이지 예외가 아니다.”

언젠가 한 번 써먹으려고 메모해놓았던 문구인데, 드디어 이제 써보게 되네요.ㅎㅎ
한때 ‘살면서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너무 많고 또 고려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귀찮아 죽겠네.’하는 생각을 한 적 있습니다. ‘선택’이 ‘자유’와 연결되어 좋은 것으로 이야기되기도 하지만,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문제들 중에서 확실한 것은 별로 없고 모든 것이 애매함 속에서 선택의 문제가 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일이, 어느 순간엔 참 귀찮게 여겨지더라고요. 그런데 그것도 한때!...일줄 알았는데 이건 뭐...아직도 그 애매함 때문에 쩔쩔매고 있으니.ㅠㅠ

1년 전 대학원에 진학할 때도 그랬습니다. ‘진학할까? 말까? 꼭 해야 될까? 필요하지 않을까?...’ 뭐 이런 애매함 속에서 갈등으로 빨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다가, 그래도 ‘진학해보자’고 결정했었어요. 대학원에 진학하고 나서는 나름 배우는 것도 많고 얻는 것도 많아 만족하고 있었는데, 오래지 않아 또 다시 갈등의 순간에 직면하고 말았답니다. ‘아...3학기와 논문학기엔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랑방 활동을 하면서 남은 1년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공부를 제대로 할 수는 있는 걸까? 아니, 졸업을 할 수나 있긴 한 걸까? 아아아...’ 뭐, 이런 애매함이었죠. 그와 함께 떠오른 생각이(라고 하기엔 좀 오랫동안 갈등하고 있었던;;) ‘안식년을 쓰면 어떨까?’라는 것이었어요. 그렇지만 동시에 ‘안식년을 쓰면 사랑방 활동은? 북인권대응팀, 반차별팀과 차별금지법제정연대는 누가? 안식년을 안 쓰면 졸업을 못 하나? 졸업을 꼭 해야 하나? 공부가 꼭 중요할까? 아아아...’ 등등 또다시 애매함에 봉착. 갈등하는 상황이 이어졌습니다.(내 인생은 번뇌와 갈등의 연속. 그게 아니라, 우유부단한 거라고요? 흥!^^;;) 그러면서도 살아가기 위해서는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들의 연속이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결정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안식년을 쓰자!고 결정했어요.

네, 저 올 한 해 사랑방 활동을 쉽니다. 재작년 총회에서 사랑방에서는 안식년제도를 도입했고, 작년에는 최은아 선배와 박래군 선배가 6개월 동안 각각 안식년을 사용했어요. 저도 이제 세 번째 수혜자가 된 것이지요. 그러면서도 여전히 고민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게 잘 한 결정일까, 다른 방법은 없었나, 나중에 후회하지는 않을까 뭐 그런.(예. 저 우유부단한 거 맞네요.ㅠㅠ)

‘안식년’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안식’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올 한 해 동안 대학원 학업에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단 4학기만에 논문을 다 쓰고 졸업을 하는 것이 큰 목표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은 사랑방 활동과 대학원 학업을 겨우겨우 병행했는데, 그러다보니 확실히 둘 중 하나는 만족스럽지 못하더군요. 아니, 둘 다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그 중에서 대학원 학업이 좀 더 만족스럽지 못했던 것 같아요. 공부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하는데, 제대로 할 수 없으니까 공부에 깊이가 없는 느낌. 그러면서도 학점을 받을 수 있다는 게(그것도 ‘잘’) 신기하기도 했지만, 그게 우리 나라 대학원 교육의 한계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뭔가 공부에 기초가 없이 표면적인 것만 있어서 중심 없이 둥둥 떠다니는 느낌. 이러면서 내가 전공자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부끄러울 것 같았어요. 비싼 등록금도 너무 아까울 것 같았고요. 그렇지만 공부에 제대로 손을 대려면 정말 해야 할 게 너무 많으니까 지난 해에는 아예 손을 못 대고 있었죠.(물론 제 능력의 한계이기도 했고요.) 그러다가 올 해에는 좀 더 제대로 공부를 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이걸로는 죽도 밥도 안 되겠다, 는 생각이 들면서. 어쩌면 무사히 졸업이라도 해보자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요.^^;; 다행히 학교에서 배우는 공부가 재미있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외국어로서의 한국어교육’을 배우고 있어요. 말하자면,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을 배우는 것이죠. 그 분야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고 그 일을 하겠다는 생각 외에는 그 학문에 대해 어떤 관심도 갖고 있지 않았지만, 공부를 해보니 의외로 재미있는 점이 많더군요. 특히 언어학이 가장 흥미롭습니다. 언어는 사람들의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고 사회와도 떨어질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인권운동으로서도 연관지어 고민할 부분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인권운동과 무관해보이던 학교 공부가 오히려 인권운동에 대한 저의 고민에 이런저런 자극을 주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좀 더 충실히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이왕 공부하는 거, 보다 확실하게 배워서 인권운동에 보탬이 돼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깊이 있는 학문은 개뿔, 졸업하기 위한 코스만으로도 허덕거리다 겨우겨우 졸업이나 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죠. 그나마 졸업이라도 할 수 있으면 천만다행!^^;;

어쨌든 그것 역시 그냥 ‘애매함’으로 남겨두렵니다. ‘애매함’은 삶의 예외가 아니라 법칙이니까요.ㅎ 오히려 지금 걱정은, 과연 정말 활동을 쉴 수 있을까 하는 거예요. ‘안식년’이라고는 하지만(그래서 사랑방 활동을 쉬기로 했지만), 상반기에는 기존에 하던 차별금지법제정연대 활동을 계속 해야 할 것 같고 그 외에도 손을 딱 끊지 못해 하게 되는 일들이 생기지 않을까...두려움 반 기대(?) 반. 2월부터 바로 안식년 시작인데 설 연휴가 끝나는 2월 둘째 주에만 해도 벌써 매일매일 일정이 빡빡하네요. 킁!ㅠㅠ

그래도 잘 ‘쉬고’ 오겠습니다. 잘 쉬는 것도 중요하고, 그 동안 하고 싶었지만 못 했던 이런저런 것들을 해보며 쉬고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공부를 열심히 해볼게요! 인권운동을 항상 염두에 두면서 사랑방 밖에서 배운 것들을 잘 엮어볼 수 있도록 해보렵니다. 다행히 지난 1년 학교에서 공부했던 것도 다 사랑방 활동 경험을 자양분으로 삼아 인권운동의 문제의식을 학문적 고민으로 풀어내며 그나마 즐겁게 공부할 수 있었어요. 이래저래 저의 공부는 인권운동에 많이 빚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학업 자체가 인권운동의 고민이 될 수 있도록 더 노력해보겠습니다.(이거슨, 반장 출마의 변?ㅋㅋ)

1년 후에 졸업 논문과 함께 돌아오겠습니다~ 부끄럽지 않을 논문을 위하여!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