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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이제 나는 상임 활동가가 아니다

이제 2월부터 나는 인권운동사랑방의 ‘상임활동가’가 아니다. 돋움활동가가 된다. 지난 1월 22일의 사랑방 총회에서 결정된 사항이다. 사랑방의 활동가 체계 상 상임이나 돋움이나 자원활동가는 다 활동가다. 그래서 외부에 말할 때는 앞에 ‘상임’을 붙이지 않고 그냥 활동가라고만 해오고는 했다. 그리고 조건에 따라 상임과 돋움, 자원을 넘나들 수 있어야 하고, 넘나들어야만 한다. 그런데도 ‘상임’이 아니라는 사실이 자꾸 생각되게 되는 것은 어쩐 일일까?

1994년 8월 1일. 이날은 최은아 활동가와 함께 정식으로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가 된 날이다. 그로부터 용산역 시대, 남영동 시대, 명륜동 시대를 거쳐서 중림동까지 나는 언제나 인권운동사랑방의 활동가였다. 그러니까 나는 23년째 인권운동을 하면서 16년 반을 인권운동사랑방의 활동가로 살아왔다. 운동에 복무한 지 31년째를 맞으니 내 운동인생의 절반은 사랑방에서 살아온 것이며, 따라서 나는 사랑방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인권운동의 불모지였던 당시의 한국사회에서 인권운동사랑방의 등장은 본격적인 인권운동을 알리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 뒤로 사랑방은 인권운동의 지평을 확장해갔다. 인권교육, 인권영화제, 인권연구 등의 활동은 다른 단체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자유권 중심의 인권운동에 사회권 영역으로의 확장과 차별 영역으로의 확장도 사랑방이 주도했다. 그런 사랑방의 역동적인 활동 안에서 나는 인권을 배웠고, 인권운동을 배웠으며, 내 스스로 변화의 주역이 되기도 했다. ‘활동가’라는 명칭도 사랑방이 쓰면서 진보운동진영에 보편적인 용어가 되었고, 인권단체들은 직책 없는 활동가 중심의 조직체계를 모방했고, 조직문화를 배워갔다. 그러므로 사랑방 활동가로 불리는 게 너무도 뿌듯했다. 다른 단체 활동가들의 부러움과 질시의 대상이었기에 오히려 조심해야 했던 사랑방 활동가로 살아온 나는 후회가 없다.

물론 나는 아직도 사랑방 활동가이며 내년에는 상임활동가로 복귀할 생각도 여전히 갖고 있다. 그런데 지금 나의 처지는 계속 사랑방 활동가로 나를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을 넘고 있다. 특히 올해는 인권재단 사람의 상임이사로 인권센터 작업을 주도할 것이기에 사람들은 박래군을 사랑방 활동가로 더더욱 인식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인권센터가 만들어지고 그로부터 파생되고 확장되는 역할들이 과연 앞으로 사랑방 상임활동가로 복귀하는 조건보다는 그 반대의 조건을 굳힐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 영영 사랑방 활동가에서는 멀어지게 되지 않을까 싶다. 사실 한 단체에 10년 이상 있다는 게 꼭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다. 그리고 한 단체에 몸담았다고 그 단체에 끝까지 남아 있어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제 사랑방을 정리해야 하는 시점이 그래서 자연스럽게 오고 있는 것 같다. 내게 사랑방의 시대는 화려했고 찬란했지만, 이제는 활동의 중심이 다른 활동의 장으로 옮겨가고 있다. 

사랑방은 2013년이면 세 번째 10주기를 맞는다. 사랑방의 생명력이었던 활력과 역동성이 많이 줄어든 것 같아서 안타깝지만, 아마도 사랑방의 활동가들은 새로운 10년의 전망을 잘 준비하면서 다시 새로운 활력소를 만들어낼 것이다. 사랑방이 세우는 새로운 전망은 또 인권운동의 지평을 넓히는 역할을 해내겠지. 그 새로운 전망을 준비하는 작업에 함께 하고 싶다. 그리고 후배들이 나처럼 오래도록 사랑방 활동가로 자긍심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고 싶다. 그래서 아직 나는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