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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대다그대

내 인생의 한가위


9월에는 "내 인생의 한가위"를 아그대다그대 이야기합니다.

송편 만들기의 부담!
송편을 이쁘게 못 만드는 나는
가급적 내가 만든 송편이 눈에 띄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늦게 송편을 만든다.
하나를 길게 붙드는 방법으로.
흐흐.
게을러서 그런 게 아니라
적게 만들면 터지거나 못생긴 게 덜 생길 거고
그럼 누가 만든 송편인지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상황이 올 테니까.
대안- 송편을 잘 만드는 사람만 만드는 것은 어떨까.
왜 꼭 다같이 만들어야 하는 걸까?
아~
올해도 공포가 엄습한다.
이번에는 몇 개나 만들지.. (바람소리)

전세를 살다가 처음 아파트를 얻어 입주하던 해 추석!
첫 장만한 집이라
어머니가 많이 들뜨셔서 송편, 잡채, 산적, 각종 부침 거리를 정말 많이 준비해었죠.
정말 처음으로 명절을 위해 무언가 같이 준비했던 시간이었답니다.
가족이 밤새 둘러 앉아 전 붙이고 송편 빚으며
니것은 어떻네, 내것은 어떻네.
좀 제대로 하라고 서로 핀잔주며 웃으며 보냈던 기억...
노동으로 먹고 사는 이들에게
내 집 마련의 꿈이 얼마나 큰 것인지,
그리고 함께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기억이었는지
느낄 수 있었던
그 해 추석이었습니다.^^ (초코파이)

움 '송편 만들며 화기애애'는
동화책에나 담겨 있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ㅋ
우리 집은 차례상 차리기에도 바빴던 것 같아요.
차례음식 얼추 준비해놓은 느즈막에서야
'아차, 송편! 올해도 별 수 없군.' 하며(이건 의도한 것도 그렇다고 안한 것도 아닌ㅎ),
그래도 동네에서 가장 맛있게 하는 떡집 찾아 줄서서
송편 한 봉지 차례상에 올렸던 기억이 가장 큰 걸보면 말이지요.
ㅎ ㅎ
(그래서 나에겐) 한가위하면 뭐니 뭐니 해도 보름달! ㅋㅑ~
왁자지껄 식구들 뒤로 하고 슬며시 나와 보름달 바라보던 때_
나름 소원도 빌고
뭉개 뭉개 피어나는 생각들을 달보며 나누던 것 같은데,
그저 동글디동근 보름달의 보드라운 노란빛만 생각나네요.
(라고 하기엔 ㅋㅋㅋㅋ : 그 편안한 시간 끝엔
친척집에서 너무 멀리 마실 나와 길 잃고 골목마다 헤매다 땀 뺀 이야기며,
'아~ 이대로 영원히 있을 수 있겠다'하며 옥상 위에서 보름달 마주한 지
30분도 안 지나 근질근질해져
이웃집 고 여사한테 전화 걸어 술잔을 기울인 걸
(고 여사는 이미 술잔 기울이고 있었다는ㅎ) 생각하니 왠지>ㅅ 올해는
정화수 떠놓고 한가위 달님이랑 잔 좀 부딪쳐 볼까나?
흐흫달 님과의 데이트가 기다려지는 올 한가위_
정신없이 달려온 자기, 토닥이며 여유로운 빨간 날 되기기기길!! (괭이눈)

내가 20살이 되던 해 부모님은 방앗간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한가위를 비롯한 고유 명절은
나에게 고난의 길이었다.
일명 "떡 사세요!"를 아실랑가.
명절 전부터 떡 만드느라 학교도 빼먹는 건 기본이고,
명절이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떡을 만들다가
방앗간에서 새우잠을 자며 며칠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고생 중에 낙이 있었으니
일을 마치고 난 후 각자 하나씩 차고 있던 전대에서
떡가루가 하얗게 묻은 돈을 꺼내 세다 보면
어느새 하루 피로가 싹 가시곤 했다.
(사실 그 돈은 자식들의 대학 등록금으로 홀랑 들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맞은 추석날 아침은?
떡 넣어서 라면 끓여먹고 바닥에 찰싹 붙어서
텔레비전 리모콘을 연신 돌리다가
그것도 심심하면 가족들끼리 고스톱 한판!
이게 근 10년 넘게 지내온 한가위 풍경이쥐. (씩씩마녀)

몇 해 전 아버지와 한창 사이가 안 좋았다.
나도 나름대로 머리가 굵어졌다고,
가부장적인 모습으로 느껴지는 아버지가 참기 힘든 불만의 대상이었던 때였다.
그 중에서도 명절은 최고의 불만의 고조기였던 것 같다.
차례상 준비할 때 아버지는 집에 계시지 않는다.
그래도 그건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명절날이 되어 오전에 차례를 지내고 나면
설거지가 끝나기도 전에 친척들이며 아버지 손님들이 오신다.
아버지는 내오는 상 앞에서 떠나지 않았고 (혹은 못했고),
어머니는 부엌을 떠나지 못했다.
난 그게 싫어 방 안에 틀어박히는 걸로 '소극적 저항'을 하곤 했다.
물론 소극적으로만 저항하지도 않았지만.
당시 아버지의 단골 멘트.
"너 이러려면 집에 내려오지 마라"
그때 홍역을 치러서 인지
지금은 그때와 별반 달라진 건 없어도 아버지나 나나
서로서로 눈치를 보며 잘 지낸다.
그래도 아버지가 좀더 집안일을 해줬으면... (씨진)

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음력으로 8월 12일이다보니
제사 지내고 며칠 안 있으면 금방 추석이다.
그래서 내게 추석은
같은 음식 또 만들고 같은 음식 또 먹어야 하는 귀찮은 날이 되어 버렸다.
매년 추석마다 난 머리를 굴려본다.
'어떻게 하면 엄마를 구슬려
요번 추석은 안 지내고 성당에 미사 넣는 걸로 슬쩍 넘어갈 수 있을까?'
하지만 엄마는 매년 '그래도 밥이라도 떠 놓아야 된다.'라는 말을 하며
어김없이 또 추석장을 보고
음식을 장만하는 일을 20년 가까이 되풀이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 추석은 어쩌면 안 지내도 될지 모르겠다.
엄마가 동생네랑 해외여행을 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추석을 안 지내는 건 좋은데
집에서 나 혼자 밥 해 먹을 생각을 하니 그것도 참... (유라)

누구도 불편하지 않게 흐르는 은은한 조명 찰랑 찰랑 먹기 좋게 부어 놓은, 누르스름한 향기 보름달은 서글 서글하게 유혹하는 막걸리 한 사발! (초화)



제주도는요, 명절을 쇠는 풍습이 남달라요.
한가위나 설이나.
대략 아버지 세대에서 6촌(8촌?) 쯤으로 엮이는 거대한 혈족 집단이,
대략 4촌쯤으로 갈라놓은 친족범위에 들어가는 집 중 한 곳을,
돌아다니면서 제사를 지내지요.
그러니까, 한 집에 대략 4~50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녀가는 거죠.
그렇게 네다섯 집을요.
어릴 때는 아빠 따라서 그 집들을 다 다니기도 했는데
지금은 음식 차리느라 가만히 집에서 기다린답니다.
사실, 여전히 그 혈족집단의 범위나 풍습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답니다.
여럿 모이는 것이 좋을 때도 있겠지만
음식하는 사람 고생, 차리는 사람 고생, 치우는 사람 고생이 말이 아니지요.
중요한 건,
그 고생이 모두 여성의 몫이라는 거~!!!
그러다 보니 저는 여남이 평등한 명절에 대한 이야기가 아주 멀게 들린답니다.
도대체가,
집안에 같이 있어야 일을 나누든 말든 하지,
여성은 집에서 친척손님들 받고
남성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는 구조가 바뀌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인 게지요.
음,
그렇다고 제가
엄청시리 많은 일을
하지는 않아요.
ㅡ,ㅡ;; (미류)



난 사실
추석에 맨날 세배를 했거든.
그리고 돈을 받아서 시디사고 옷사고 이러는데 다 써버리곤 했는데,
내 동생은 돈을 안쓰고 차곡차곡 모아서 어느새 통장에는....
와...
난 그래서 추석하면 떠오르는 생각은
항상 세배와 갈비찜, 그리고 친척들이 나에게 하는 해코지??ㅎㅎ
예전에는 친척집가는게 좀 좋았는데
2년 전부터 인가? 왜이리 가기가 귀찮은건지.
허허 (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