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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첫 기억

어느 주말, 여유로웠던 저녁이었습니다. 기숙사에 처박혀 하릴없이 인터넷 검색을 하다 영화제 하나가 폐막한다는 정보를 접했습니다. 그것도 공짜. 저녁에 뭘 하기엔 버거운 일요일이었을텐데, 그날은 괜히 마음이 동했습니다. 보러갈까? 공짜라는데. 인권영화제? 인권의 내용도 전혀 모르던 저는, 하루종일 기숙사에 처박혀 있느라 지끈해진 머리를 식힐겸 어찌저찌하여 종로까지 갔습니다. 처음 간 서울아트시네마였고, 가는 길에 풍기던 돼지고기 삶는 냄새도 난생 처음이었습니다. 투박하고 허름한 건물 안을 들어가 극장 안에 들어섰을 때, 이미 폐막식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뒷좌석에 앉아서 폐막작이라고 하는 작품 하나를 보았습니다. 

엉엉 울었습니다. 아직도 아련하게 들리는, 그러지 마세요, 그러지 마세요 하던 여자 목소리. 밀어내고 밀리지 않으려 싸우는 사람들. 아무도 없는 초등학교 운동장. 대추리 사건에 관한 다큐였습니다. 그런 일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한없이 길게 늘어진 슬픔 한자락과 머리 위에 동동 뜬 물음표를 이끌고 기숙사로 돌아왔습니다. 그날 새벽 늦게까지 대추리 관련 기사를 뒤져서 읽고 읽은 기억이 납니다. 신문 매체간의 다른 보도에 적잖이 놀랐습니다. 이게 뭔가 싶어서, 왜 한 사건에 대해 다루는 내용이 이리 다를까 싶었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사실들에 혼란스럽기보다 내가 이 사건을 어떻게 봐야할 지는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전 어릴 때 도덕의식에 굉장히 강박관념을 느끼던 아이였습니다, 친구가 길에 쓰레기를 버리면 다시 주으러 가는 유난을 떨고, 아침조회 때 묵념이라도 할라치면 눈에 눈물을 머금곤 했습니다. 그런 제가 스무 살을 넘어 서울엘 오고 우연히 인권영화제를 접하고 사랑방을 알고, 그에 엮이는 관심사들을 쫓아다니게 됩니다. 그 즈음이 도덕으로부터 윤리, 알던 것을 의심하고 내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하는 그런 윤리적 진정성이 생기기 시작한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흔한 말로 빨간약을 먹었다 하잖아요. 다만 이게 유행타는 빨간약은 아니길 바라지만요.

그러니까, 어떤 전환점이 있었고, 그게 인권영화제고 사랑방이었습니다. 돋움활동가 편지를 쓰겠다고 앉아선 멍한 머리에 문득 떠오른 이 기억. 아 맞다 그랬었지! 신기하다 재밌다 하고 있습니다. 내가 결정적으로 인권에 관심을 갖게 한 어떤 시작점이 있었다는 사실에 괜히 뭉클해지기도 합니다. 우습지만, 괜히 비장해지기도 하고요.

그랬는데, 이젠 제가 돋움활동가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나를 생각하고, 처음 인권운동사랑방이라는 이름을 알게 됐을 때를 기억하며, 멀리 떨어진 시간의 두 점을 선으로 이어봅니다. 새삼, 내가 살긴 살아가는구나, 싶습니다. 자원활동이 내 만족을 위해서였다면, 돋움활동은 내가 사랑방에 어떻게 기여(?)할까 고민하는 일이 포함될텐데, 별 거 아니더라도 나라서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또 그게 사랑방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욕심을 가져봅니다.

편지라는 걸 쓴답시고, 전 또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허덕이지 않고 신나고 재밌게 사랑방 활동을 계속 해나가고 싶습니다. 말이 쉬울 뿐일까요. 그래도 전 재미없는 건 못 합니다. 진짜 그래요. 아, 활동가들에게 밥 한 끼씩 얻어먹는 거 되게 감동이었습니다. 묘한 부담감(?!)과 그보다 더 큰 위로. 이 위로는 허름한 벽이 스륵 무너지는 소리. 이 사람, 마음 깊은 곳에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구나. 표현하기 어려웠던 걸 누군가와 만나서 더듬더듬하게라도 나눌 수 있을 때, 그럴 때. 생각해보면, 이제야!! 하하. 제가 좀 느려요. 남들에 비해 인생도, 말도 행동도, 사람과 친해지는 것도 참 늦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를 위해 특별히 준비해준 질문들도. 다시 한번, 맛있는 밥 잘 먹었습니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