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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오늘 아침에....

오늘 아침에....
쥬리 (자원활동가) 오늘 새벽, 곤히 잠들었다가 집에 물과 얼음이 밀려들어온 것을 깨닫고 눈을 떴다. 친권자로부터 독립한지는 일 년, 애인으로부터 독립한 지는 이제 일 주일. 신촌역 근방인데다 색색의 타일이 깔린 베란다에 반해서 계약한 내 집은 이렇게, 내가 누운 좁은 침대를 제외한 거의 모든 바닥이 물과 얼음으로 들이찼다.
그날 마침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잤던 전 동거인이 방바닥에 찬 물을 빼내고 있는데도 정작 나는 넋을 잃고 그냥 침대에 앉아서 덜덜 떨고 있었다. 계약할 때부터 집이 추운 것은 알고 있었지만 발에 닿는 그 살얼음이란, 베란다를 열어 보니 오 센티미터 두께로 얼음이 깔려 있었다.
임대인에게 전화를 하고, 아는 사랑방 활동가에게 전화해서 내가 임대인에게 무엇을 요구할 수 있는지를 물어보고, 집에 찾아온 임대인과 말싸움을 하고, 임대인과 전 동거인이 집에 들어온 물을 치우는 동안 나는 참 책임감 없게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었다. 그러다 잠이 들어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몹시 불안한 꿈을 꾸다가 깨어나니 오후였다. 햇살이 비치고 있는데도 너무 춥고 서글퍼서, 결국 사우나로 피신했다.
전 동거인은 배수시설의 문제라고 임대인에게 수리를 요구하고, 임대인은 며칠 전에 수도관 안 얼게 하는 장치를 달아주려고 전화했는데 왜 안 받았냐고 나에게 화를 내고, 이 집이 하자가 있는 건 분명한데 어떤 것을 고쳐달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네, 네 하고 별 말을 못 했다. 임대인은 내가 어제 수도관 얼지 말라고 물을 조금 틀어놓았던 것이 원인이라고, 파이프가 얼어서 터진 거라고 했다. 못 믿을 말은 아니지만 미덥지도 않아서 속상했다.

작년 초에 인권운동사랑방에 자원활동을 지원하고, 주거권이란 단어를 거의 처음 접했다. 그러다 얼마 안 있어 탈가정을 하는 바람에 주거권은 내게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었는데, 약 한 달간 지냈던 청소년 공동체의 공간이 없어지는 바람에 당장 잘 곳도 쉴 곳도 마땅치가 않았다. 급하게 단기 아르바이트 해서 번 돈으로 친구와 고시원 방 한 칸을 잡고 30만원에 한 달을 살았는데, 1평 남짓한 방에서 두 명이 사는 건 정말 죽을 맛이었고, 환기도 위생도 보장되지 않는 공간이라 건강은 계속 악화되었다. 그렇게 한 달을 살고 난 후에는 전 동거인의 엄마가 보증금을 지원해준 덕분에 월세방을 계약할 수 있었다. 탈가정 청소년치고 참 순탄하게 주거공간을 쟁취한 셈이었다.
탈가정 청소년의 주거권을 이야기할 때, 탈가정 후 당장 생존 가능의 여부가 되는 주거의 문제도 있지만, 공간에 대한 주체적인 권리(‘우리 집’은 우리 집이 아니라 아빠 집인 경우가 대부분 아닌가, 가정 안에서 공간에 대한 권리는 내게 없었다)와 그 공간에서 자신이 얼마나 독립적이고 안전할 수 있는지, 함께 살아갈 사람들을 선택할 수 있는지가 함께 고려되어야 ‘그럼 다시 집으로 돌아가면 되지 않니’ 하는 이상한 결론으로 치닫지 않을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탈가정을 했고, 애인과 함께 살다가 위태롭기 그지없는 ‘자취’의 길로 들어서게 된 거였다. 그런데 오늘 아침 그 독립적인 공간에 대한 권리를 찾고자 홀로 사는 길을 택한 이상 공간에 대한 책임도 오롯이 내게 있다는 걸 확 깨달은 셈이다. 물론, 내가 돈이 좀 더 있어서 ‘괜찮은’ 집을 구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라고 불특정한 대상에게 원망을 하기는 했다.

이 집을 계약하기 전, 비슷한 가격에 조금이라도 나은 집을 구하려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는데, 못 세 개로 고정된 철판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옥탑방부터, 저게 집인가 싶은 - 작은 컨테이너 박스 같은 집과, 옥상에 대충 판자로 지어 바람 많이 불면 무너질 것 같은 집, 그런 집들을 여러 개 보았다. 그러다 문득 주택가의 옥상들을 살펴보게 되었고, 저기도 사람이 사는구나, 내 발 밑 작은 창문 뒤에도 사람 사는 집이 있구나, 밤에 빛나는 불빛 하나하나에서 사람이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살만한 집에서, 함께 살고 싶은 사람과 어느 정도의 독립성을 갖고 안전하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나저나 내 집은 어떡해, 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