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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투, 여덟살 구역] 내 삶과 네 삶

마음 읽어주는 언니를 개업(?)한지도 벌써 두 달이 되어간다. 그동안 6번의 수업을 진행했고, 한 번의 소풍을 다녀왔다. 6번의 수업에 관한 자세한 썰은 직접 준비하고 진행했던 쩡열이 훨씬 더 생생하게 전해줄 수 있을 것 같다. 헌데 보시다시피 이번 달도 어쩌다보니 내가 쓰게 되었다! 그러니 아쉽지만 마음 읽어주는 언니의 자세한 수업 스케치는 다음번 연재까지 좀 더 묵혀두기로 하고, 오늘은 ‘한 번의 소풍’에서 개인적으로 느꼈던 것들 위주로 써볼까 한다. 내 차례에서는 당장은 이 이야기를 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강화도 초딩들의 서울 나들이

책언니 하면서 수업 째고 놀아본 적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꽤나 많았고, 딱 한번뿐이지만 아예 강화도 근처 해수욕장으로 소풍 간 적도 있다. 예기치 않은 실내소풍이든 계획된 실외소풍이든 우리에게는 나름 흔한 일이었다는 소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소풍은 정말이지 특별했다.

4월 1일 만우절 날, 거짓말 같게도 강화도에서 애들이 찾아왔다. 버스라고는 학교 셔틀버스 밖에 안 타본 애들이 자기들끼리 버스를 타고 마포구 망원동에 있는 우리 사무실까지 서울 나들이를 온 것이다! 개교기념일이라 학교가 쉬는 틈을 타 성사된 뜻밖의 소풍이었다. 서울 소풍 가자고 정하자마자 다들 난리가 났다. 무섭다, 신난다, 어른 없이 우리끼리 진짜 갈 수 있냐, 버스는 어디서 내려야 하냐 기타 등등. 4학년이 되었다고는 해도 워낙 강화도에서 부모 차만 타고 다녔던 애들이라 버스를 엄마 없이 타고, 자기들 힘으로 서울처럼 먼 데 가는 경험 자체가 처음이었다. 한 엄마는 이 시도를 두고 애들끼리 하는 ‘모험’이라 칭하기도 했다. 과연 모험은 모험이었는지 연주는 대망의 소풍날, 꼭두새벽부터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전날 밤부터 엄청 긴장했던 모양이었는지 출발시간을 자꾸만 확인했다. 매번 애들을 만나러 강화도에 가기만 하다 졸지에 나다 사무실에서 애들을 맞이하게 된 우리도 설렘 반, 걱정 반의 심정이었다. 그리고 4월 1일 아침, 애들은 뭘 그리 걱정했냐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합정역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이게 뭐라고 정말로 무사히 왔다는 사실에 살짝 감격했다는 건 비밀이다. 정류장에 엉거주춤 내려선 애들 얼굴이 영락없는 시골아이들 같아서 무지 웃겼던 것도 비밀이다!

좋은 날


지난 수업 때 짰던 소풍 일정은 다음과 같았다. 1번, 나다 사무실에 가서 토마토 파스타와 마늘빵을 먹는다. 2번, 안에서 보드게임 등등을 하고 논다. 3번, 시장에서 과일과 과자를 사서 근처 한강공원에 간다. 4번, 차가 안 막히게 다섯 시 반까지 합정역으로 돌아간다. 귀가시간이 한 시간 더 늦어진 걸 빼고는 모든 퀘스트(?)를 완벽히 수행했다. 쩡열이 직접 만든 마늘빵을 대접하고도 마늘이 너무 많다고 구박 당하긴 했지만, 비록 사무실 한켠에 있는 내 방이 남자애들의 레슬링을 감당하느라 초토화가 되긴 했지만, 이 모든 상황들이 그냥 다 웃기고 재밌었다. 사무실에서 잡다한 인형들 주워 모아서 즉흥으로 괴상한 인형 연극을 벌이고, 남녀 가릴 것 없이 출렁거리는 침대에 모여앉아 색색깔 매니큐어를 발라보고….

봄날 아니랄까봐 햇빛이 따듯한 날이었다. 그래서인지 이 날 있었던 일은 한 순간 한 순간이 다 반짝반짝 빛나는 기억으로 남는다. 우리가 먹고, 생활하고, 일하는 공간에 애들이 들어와 있는 모습을 본다는 건 특별한 경험이었다. 수업은 일이니까, 은연 중에 내 사적인 삶과는 나눴던 게 있었던 것 같다. 알게 모르게 분리되어있었던 서로의 삶의 영역에 훌쩍 더 다가가고, 또 들여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꼭 우리 집에 놀러와서라기보다는 아주 예전부터 이미 그래왔던 걸 이 날 새삼스레 실감했다.

실은 그 무엇보다도 애들한테 정이 많이 들었다는 걸 느꼈다. 전날 잠을 잘 못잔 채로 하루 종일 노느라 몸은 정말 피곤했는데, 애들이 재밌게 놀다 갔으면 싶은 마음이 더 커서 딱히 힘들지가 않았다. 그냥 그날 다 같이 있는 시간 자체가 너무 소중하고 좋았다. 꼭 부모가 아니라고 해도 누군가의 성장을 옆에서 긴 시간 지켜보면서 갖게 되는 애틋함이나 책임감 같은 것들이 있는 것 같다. 가끔 그런 질문을 들었다. 지금 이 애들이 다 자랄 때까지 만날 수 있을 것 같냐, 그럼 기분이 어떨 것 같냐. 처음에는 너무 먼 일 같고 현실감이 없었는데, 이제는 못 만나게 되면 너무 허전할 것 같다. 남인 체 하고 살기에는 우리는 이미 이렇게 엮였다. 관계가 오래되고 깊어질수록 책임도 더 커진다. 나는 겁쟁이라 누군가의 인생에 참견하고 개입해야 하는 일이 무겁고 무섭다. 그래도 애정이 더 커지다보면 이런 두려움도 점점 무뎌지지 않을까. 온종일 애들이랑 놀면서도 피곤한 줄 몰랐던 이날처럼.

내 삶과 네 삶


사무실이 집이다. 애초에 20대 상근자들의 주거 지원을 염두에 두고 사무실을 구하느라, 방 3개짜리 가정집을 계약해 쩡열과 내가 2개의 방을 각자 자기 방으로 썼다. 바꿔 말하면 집이 사무실이기도 한 거라 나다 활동과 내 사생활이 잘 분리가 안 된다. 근데 나다가 하는 활동들이 워낙에 공사를 구분해야한다는 세간의 얘기들에 잘 안 들어맞는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교육에는 퇴근이 없다. 수업만 끝난다고 땡이 아니라, 만나는 사람 한명 한명의 인생을 걱정한다. 자꾸 남 걱정을 한다. 한명 한명의 인생은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이걸 생각하기 시작하다보면 한도 끝도 없이 머리가 아파지는데, 심지어 이건 아무리 해도 답이 없는 고민이다.

한때 개인주의에 쩔었던 나는 내 인생, 네 인생 구분하면서 적당히 간섭 안 하는 걸 편하게 여기는 인간이었고, 나다에서 초등학생들이랑 수업을 하게 되고 나서도 내용만 잘 짜서 해내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수업도 수업이지만, 관계를 잘 챙겨나가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얘기들이 머리로는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그렇게 살기가 부담스러웠다. 내 영역을 딱 지키고 사느라 남들 들이는 게 영 어려웠다. 부대끼고, 피곤하고, 나는 내 것만으로도 이미 벅찬데. 그렇게 볼 멘 얼굴을 하고 지냈다. 과거형이 아니라 실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쪽팔리고, 힘들고, 매일매일 내 삶과 네 삶의 구분선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나는 뭘 지키고 싶어서 이 일을 하고 있나. 세상 돌아가는 일들에 화내고 슬퍼했던 감각인지, 이미 익숙해진 일상인지, 자존심인지, 모두와의 관계인 지. 여전히 아직도 어렵다.

사람 만나는 일을 한다. 교육이라는 영역 속에서 네 삶에 대한 책임을 나 몰라라 해서는 안 되는 삶을 살고 있다. 책언니는 내가 나다 와서 처음으로 맡게 된 일이었다. 강화도 애들이 나한테는 나다 활동하면서 가장 오래 맺은 관계고, 제일 친한 애들이다. 흔치 않은 시간이었다는 걸 안다. 겨우 쌓은 신뢰, 이미 소중해진 관계, 우리 사이의 유대감을 잘 지켜나가고 싶다. 일로만 분리되지 않는, 내 삶 속에서.
덧붙임

엠건 님은 교육공동체 나다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