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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라의 인권이야기] ‘여기 국정원이 있다.’

‘안철수가 빈손으로 철수를 했다’라던가 ‘안철수의 오발탄’이라며 비아냥대는 기사들이 넘실거린다. 야당의 국민정보지키기위원회 활동이 국정원의 로그파일(사용기록) 제출 거부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해킹팀에서 해킹 프로그램을 구입해 민간인 사찰 의혹을 받고 있는 국정원에 대한 진상규명은 미궁으로 빠져버렸다. 누구에게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활용했는지 알고 싶지만, 국정원의 침묵과 거부의 벽은 완고했다. 또다시 국정원에 대한 의혹만 남긴 채 정리되는 사건이 아닐까 그런 우려가 커지던 중, 8월 19일 수원지역 시민들은 민간인 사찰과 해킹 의혹을 규탄하기 위해 국정원 수원사무소를 찾았다.


‘여기 국정원 있다’라고 마구 소리치고 싶지만, 음지에서 활동하고 양지를 지양한다고 했던가. 국정원 수원사무소는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외지고 머나먼 곳에 있었다. 진상규명과 의혹해명, 국정원 규탄이라는 비장한 각오를 품고 길을 떠났건만, 공사장 소음만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수원사무소에는 경찰, 국정원, 그리고 우리뿐이었다. 차라리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서 선전전을 하지 왜 사람도 안다니는 국정원 앞으로 갔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영화 ‘암살’에 나오는 안옥윤의 명대사처럼 “그렇지만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라는 답으로 대신하려 한다. 처음 해킹 프로그램 구입이 알려진 이후 들끓던 언론과 사회는 시간이 지날수록 조용해지고 있다. 기억하고, 떠들고, 분노하는 이들이 없다면 여론의 침묵 속에 숨어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계속 이야기해주고, 너희들을 감시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런 고민 속에서 국정원을 걱정하는 사람들의 점심 나들이가 시작되었다.


밥만 먹고 갈 수 없기에 간단한 프로그램들이 진행되었다. 첫 번째 프로그램은 <국정원 걱정 방석퀴즈>. 국정원의 역사와 현재 진행형인 이야기들을 퀴즈로 풀어보는 시간이었다. 두 번째 프로그램은 요즘 최고 유행 프로그램인 ‘냉장고를 부탁해’를 콩트로 꾸민 <국정원의 ‘ 냉장고를 부탁해’>. 만들어 볼 요리는 비빔밥으로 이탈리아에서 사찰음식을 전공한 셰프를 모시고 와서 음식을 만든다는 콩트였다. 주재료로는 음지에서 자라고 양지를 지양하는 숙주나물과 5월 16일 3시에 낳은 달걀로 만든 계란후라이, 이탈리아에서 나나테크를 통해 직수입한 애호박 등이었다. 여기에 국정원을 초치기 위한 초고추장까지 넣어 쓱쓱 비비면... <국정원표 ‘냉장고를 부탁해’> 완성! 참가자들과 콩트를 하면서 만든 비빔밥을 나눠먹었다. 땡볕이긴 했지만, 오순도순 모여 먹는 밥맛은 참 좋았다. 물론 '저것들 뭐하냐'라는 경찰들의 따가운 시선도 있었지만 말이다.

점심을 먹고 진행한 마지막 프로그램은 <국정원배 과거시험>. 국정원을 걱정하는 애절한 마음을 담아 시나 산문을 쓰는 시간으로 제로는 국정원, 민간사찰이 주어졌다. 심사기준은 완결성, 문학성, 풍자성, 이를 고려해 얼마나 완성도를 갖췄는지였다. 짧은 시간 동안 펼쳐진 창작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국정원을 걱정하는 애절한 마음 덕에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과거시험의 1등 상인 사찰대상은 민간사찰로 4행시를 완성한 시민에게 돌아갔다. 웃고 떠들며 재밌는 시간이었지만, 우리가 국정원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국정원을 속속들이 뜯어보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이번 한번으로 끝내지 말고 종종 찾아와서 우리가 지켜보고 있음을 알려주자는 참가자들의 후기도 이어졌다. 증거자료를 내놓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다 해서 끝난 것이 아니라, 감시하는 시민들이 건재하다는 걸 알려줘야 한다는 것이 참가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국정원을 제대로 지켜보자는 결의와 함께 제1회 국정원 점심 나들이는 마무리되었다.


갈수록 촘촘한 감시의 사회다. 사각지대를 알 수 없는 감시의 시선 아래 살고 있어 그런가? 해킹과 사찰은 낯설지가 않다. 흔해진 만큼 충격의 감도가 덜한 것 같기도 하다. 아마 이전부터 어마어마한 일들을 벌여왔기 때문에 ‘이건 뭐 예상한 일 아니었어?’라는 체념도 있을 것이다. 익숙해짐과 체념 속에서 국정원은 로그파일을 내줄 수 없다 배짱을 튕기고, 여론과 분위기를 조작해 은근슬쩍 물타기를 하려는 것이 아닌가 싶다. 국가 안보로 위장하지만, 국가가 아닌 독재정권의 안보와 안전만을 위한 국정원, 법과 국민 위에 군림하는 이런 기관이 왜 아직 존재해야 하는 것인지, 참 이상한 나라의 이상한 국정원이다. 국정원은 스스로 5163부대라고 칭한다. 군사 쿠데타와 유신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아직도 과거를 살고 있는 국가기관이 국민들을 감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간인 사찰은 없었다는 국정원 말을 누가 믿겠는가. 하지만 제발 익숙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사찰과 해킹, 국정원의 모든 악행들을 ‘쟤들이니까 그럴 수 있지’가 아니라 ‘또 쟤들이네, 달라져야 하지 않겠어?’라는 이야기들이 넘실댈 수 있도록 말이다. 아직 의혹들은 그대로고, 진상규명도 진행되지 않았다. 제대로 된 수사와 진상규명, 그리고 사건 한 달여가 지나도록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이 사죄의 말 한마디라도 뻥긋할 수 있도록 더 많은 힘 모으기가 필요한 때이다.
덧붙임

랄라 님은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