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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박원순 시장의 인권 포기 선언에 부쳐

광주, 충남, 수원, 서울 등. 이 지역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인권헌장(조례) 등을 제정하였거나 추진한 지역들이다. 헌법과 국제 인권규범이 보장된 인권을 실질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여러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구체적인 이행 원칙을 정하는 일련의 과정은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이것이 지자체 단체장의 업적쌓기용으로 이용되면서 인권의 기본 원칙이 훼손되기 쉬움은 익히 우려된 바이다. 올해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 과정은 이러한 우려와 문제점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사회적 합의’를 빙자한 서울시의 직무유기

서울시에서는 지난 몇 달간 시민위원들이 6차례의 토론, 각 분야별 간담회, 권역별 두 차례의 토론회 등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 혐오 세력들이 공청회 등 각종 자리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표현을 쏟아내며 공적인 장소에서 차별 금지를 이야기하는 이들을 지속적인 위협하였다. 그런 위협에도 불구하고 지난 11월 28일 시민위원들의 결정으로 차별금지 사유가 모두 나열된 서울시민 인권헌장이 결정되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울시는 이 과정에서 일어난 혐오 세력들의 반발에 굴복하여 ‘사회적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며 인권헌장 폐기를 선언하며 그동안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

인권은 만장일치의 ‘사회적 합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누구의 인권도 합의라는 명목으로 협상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모두가 당연히 누려야 할 인권을 타협의 대상으로 만드는 순간 인권은 오히려 뒷걸음칠 수밖에 없다. 인권의 역사는 인권에 대한 공동의 논의와 노력을 방해하는 기득권 세력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누려야 할 인권이 있음을 확인하고 폭을 넓히려는 끊임없는 노력의 과정이었다. 세계 인권 선언을 만약 나치와 합의하려 하였다면 그것은 결코 선언될 수 없었다. 반인권집단의 폭력에 대한 경각심이 오늘날의 인권을 만드는 큰 밑거름이 되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정말 필요한 것은 합의를 빙자하여 인권을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체적인 권리의 내용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을 마련하는 것이다.

신중해야 할 지자체의 인권 제도화

이번에 서울시가 ‘사회적 합의’라는 명목으로 거부한 차별금지 조항은 기존의 국가인권위법은 물론 우리나라도 참여한 유엔인권이사회의 성적지향과 성정체성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결의안 등에서 이미 인권의 중요한 영역임을 분명히 한 부분이다. 서울시가 애초에 이를 제대로 인지하고 인권 헌장 제정 과정에서 혐오 세력들의 혐오 발언 등에 대해 좀 더 분명하고 단호한 입장을 보였어야 했다. 또한 시민들과 이러한 내용을 공유하고 함께 토론함으로써 각자의 인권 의식을 향상시킬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서도 기능할 수 있도록 했어야 한다. 그러한 노력이 있을 때 ‘인권 도시’가 수식이 아니라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제대로 뿌리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인권은 단순히 몇몇 조항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인권이 조항의 문구에 갇힐 때 그것은 정치적 싸움의 문제가 됨으로써 오히려 더 많은 빈곳을 만들어 낸다. 포괄적 차별금지 조항이 결국 실질적으로는 어떤 차별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는 것이 될 위험처럼 말이다. 인권의 한 글자 한 글자를 채워나가는 과정은 그 지역 주민들이 참여하여 그 의미를 함께 새기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2012년 국가인권위의 지자체별 인권 조례 제정 권고 이후 거의 대부분의 지자체에서 인권 헌장 혹은 인권 조례가 제정되거나 논의되고 있다. 이러한 인권 조례 및 헌장의 제정 과정이 지자체장의 단순한 업적쌓기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지자체가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세심하게 인권 문제에 다가서야 한다.

박원순의 인권 포기 선언은 철회되어야

이번 서울시의 인권헌장 폐기 입장은 단순히 서울시에 인권헌장이 사라진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사회적 합의’라는 명목을 내세워 인권을 이야기하는 모든 자리가 혐오 세력에 의해 훼손되고 인권에 대한 논의를 계속 유예시킬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 서울시의 태도는 혐오 세력을 대변하여 인권 포기 선언을 한 것에 다름 아니다. 이미 혐오세력들은 성북구와 광주 등에서도 이미 마련한 인권 헌장은 물론이며 국가인권위법도 고쳐야 한다고 더욱 기세등등하게 나서고 있다. 이 책임은 결국 공공의 장소에서 자행된 혐오 세력의 폭력을 방치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권에 대한 기본 원칙도 없이 단순히 업적쌓기로 인권 문제에 접근한 서울시에 있다. 서울시는 지금이라도 인권 헌장 제정을 선포하여 인권은 결코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나아가 성소수자의 인권 등 서울이라는 도시 안에서 누군가 제대로 누리지 못하였던 제대로 지켜지지 못한 인권이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찾고 이를 보장하는 실질적인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덧붙임

초코파이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