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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네 방앗간] 내 노동이 하찮아?

얼마 전 설 명절 즈음, TV의 모 프로그램에서 부부간의 불화를 다루는 걸 보게 되었다. 아내는 명절에 자신이 얼마나 힘든지 토로하고 그걸 알아주거나 도와주지 않는 남편에 대한 서운함을 쏟아내고 있었으며 남편은 명절이 되기 전부터 앓는 소리한다며 아내의 이야기에 질색하고 있었다. 이 갈등은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반복되는 것으로 부부간의 감정의 골은 꽤 깊어보였다. 명절이 돌아올 때마다 다투는 우리 오빠 네나 명절 후 이혼율이 급증하는 현실을 보면 그 부부의 이야기는 단지 그들만의 사정이 아닌 것 같다. 메인 포털사이트에서 억대가 넘는 결혼식장을 고집하는 여자들에 대한 기사의-이것이 왜 놓치면 안 되는 기사 수위에 올랐는지는 차치하고-베스트 댓글이 이혼 시 절반의 위자료를 나누는 것에 분통을 터뜨리는 것이었는데 그것에 대한 수많은 지지는 여성의 노동과 기여에 대한 인식이 어디쯤인가 새삼 되묻게 된다. 관계, 감정이입, 연민, 사랑, 정서 등으로 수행되는 돌봄 노동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기초해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노동으로 인식되기가 어렵다. 그것을 빌미삼아 타인의 노동에 빨대 꽂고 심지어 자신의 행위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음은 여전히 여성들의 ‘등골브레이커’ 시대에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보이지 않는 노동

여성주의자들은 여성들의 비가시적이고 사소화, 사적화 되었던 여성들의 가사노동, 친족노동, 보살핌 노동 등의 사회적 재생산의 노동을 가시화시키고 문제화함으로써 생산과 비생산, 시장과 비시장, 노동과 비노동, 노동과 삶의 이분법적 인식체계에 균열을 가해왔다. 주류경제학의 기준이 남성을 경험을 중심으로 해석됨으로써 재생산의 영역, 즉 주로 여성들에게 ‘여성의 일’로 맡겨져 왔던 노동은 경제적인 ‘노동’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개인이 생활하는 공간이 영위되고 지속되기 위해 이뤄지는 가사, 양육, 자신을 돌보고 가족을 돌보는 이러한 활동들은 시장영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가절하 되었던 비시장, 재생산의 영역에서의 활동이다. 또한 친척, 친구, 지인, 이웃들과의 사회적 네트워크를 주고받는 것은 인간의 삶의 유지와 질적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함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덜 중요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인식된다.


P(*)는 가부장적 아버지 밑에서 4남매 중 차녀로 태어났으며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랑받는 오빠와 남동생, 대찬 성격을 가진 장녀인 언니의 틈바구니 속에서 순종적이고 주변을 잘 배려하는 딸로 자라났다. 남동생보다 학업 성적이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대학 포기를 종용 당했고-남동생은 사립대학에 갔다-불혹이 넘은 나이에 방송통신대학교의 졸업을 앞두고 있다. 그녀는 그 때 자신이 집안 사정을 배려하지 않고 좀 더 욕심을 부렸더라면 결과가 혹은 그 후의 자신의 인생이 달라졌을까 자조한 적이 있다. 사람들에게 매우 친절하고 가족들 사이에서도 윤활유 역할을 하는 그녀는 역설적으로 사람들 만나는 것을 피곤해하고 주기적으로 자신의 역할에 대한 피로감과 권태를 느낀다.

자기를 희생하거나 배려하면서 가족들 속에서 자신의 자리매김을 해왔던 그녀의 관계 맺기는 다른 관계에서도 확장되어 주변 사람들에게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좋은 사람’이지만 그녀는 정작 스스로가 편안하지 못하다. 함께 있는 다른 사람의 욕구와 생각에 맞춰주느라 정작 자기 돌봄을 하지 못하는 그녀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늘 피곤하다. 가족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제일 먼저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고 화목한 가족으로 잘 기능될 수 있도록 각 가족 구성원의 상황을 살피는 것도 그녀의 일이다. 그러나 때로 자신이 소진되는 느낌과 자신의 노력이 인정받지 못하는 느낌이 들 때면 가족과 분리된 개인으로서의 ‘나’를 찾고 싶어진다.

돌봄 노동은 뚜렷하게 가시화되지 않고 그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것은 돌봄을 받은 사람의 개인적 특질에 달려있다. 내가 베푼 돌봄이 때로 전혀 인지되지 못하거나 인지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노동으로 인식되지 않을 경우 그저 내가 좋아서 하는 어떤 ‘행위’로 받아들여져 보상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서적 유대를 담보로 한 노동 착취를 인식하지 못하는 이에게는 그저 착한 사람의 딜레마로 남을 수 있다. 경제학에서 생산적 행위로 인정되지 않는 이타주의, 상호존중과 존엄, 호혜주의와 같은 정감들로 사회적 관계를 맺는 것은 돌봄 노동에 포함되는데 이런 노동과 실천에 대한 가치는 비가시화되고 평가되지 않기 때문에 P는 자신의 노동에 대한 가치 존중 및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좌절이 큰 것이다. 점점 경쟁적으로 되어가는 우리 경제는 돌봄 노동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고 보상하지도 않는다.

왜 여성이 남성보다 이타적인가?

K(*)는 어머니보다 가사도우미들의 돌봄에 익숙했고 그 자신 또한 가족 내 여성으로 기대 받는 역할보다 개인으로서의 자신에 충실한 삶을 살아왔다. 결혼 적령기에 중매결혼 후 두 아이의 엄마이자 아내가 된 그녀는 현재 자신보단 다른 사람의 필요가 우선시되는 상황에 처해있다. 그녀의 기질과 이제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식과도 배치되는 보살핌 노동을 잘 할 수 없는 그녀는 그런 자신에 대한 좌절 및 도피 욕구를 느끼고 있다.

생태적으로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모성애에 대한 도덕적 가치와 사회적 압력은 그녀에게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고 있다는 죄책감을 조장한다. 마거릿 생어가 말했듯이 강제된 모성은 다른 사람의 욕구에 강제로 종속되는 것과 같다고 한다. ‘개인’이길 강조하는 현대의 담론과 사회적 풍조 속에서 자란 그녀는 차라리 자신이 옛날 여자들처럼 교육을 받지 않았더라면 하고 한탄한다. 이타적 여성이길 강요하는 강박과도 같은 관념과 자녀 양육 및 가사노동에 대한 여성들의 전통적 책임은 오히려 여성들로 하여금 돌봄 노동에 대한 부담감을 주며 기피하고 싶게 만든다. 결혼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거나 출산율이 낮아지는 현상은 위와 같은 사실을 반증한다. 그러나 사회는 여전히 희생적 어머니의 역할을 강요하면서 그 이타성에 기대고 싶어하는데 국가나 재화를 통한 차가운 돌봄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돌봄 노동을 게을리 하는 여자들이 자기 이익만 추구한다는 불합리한 비난을 낳는다. 그리고 보살핌이 정당화되는 ‘가족’ 가치 안에 속하지 않은 비혼 여성들과 동성애자들을 비판하고 미워할 수 있는 빈약한 근거로 작용한다.

바버라 버그만은 “가사 노동과 돌봄 노동을 낭만화 하는 일은 여성에게 불리하다”며 호통을 친다. K뿐 아니라 직장을 다니며 일과 가정을 병행하는 여성들의 경우에도 돌봄 노동이 부담스러운데 그들은 가사 때문에 남성들보다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비난을 공공연히 받고 있다. 또한 최근 저임금과 낮은 처우개선을 위해 시위를 벌였던 보육교사처럼 돌봄을 수행하는 직종 또한 그 가치평가가 낮다. 만약 돌봄 노동이 이타적 여성이라는 기질적 특성으로 치부된 사적 영역이 아니라 노동으로 제대로 인식되었다면 가사와 직장 노동을 모두 수행하는 워킹맘의 경쟁력이 남성중심 노동패러다임으로 평가되지 않았을 것이고 돌봄 직종 또한 한겨울 추위에 떨며 시위를 벌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나를 돌봐주세요

보살핌은 물리적 돌봄을 넘어서는 정서적 의미의 돌봄도 포함한다. 인간 생존에 주어져 있는 기본적 조건은 자립이 아니라 의존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어떤 식으로든 누군가의 돌봄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물적 자본이 더 중요시되는 사회에서 개인의 정서적 안정이 얼마나 안녕한가에 대한 관심은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삶이 점점 공허해지고 각박해지는 느낌이다. ‘내 쉴 곳은 오직 내 집뿐이다’라는 유명한 노래 가사는 사랑과 연대의 집약체인 가정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 가정은 가족 구성원의 서로에 대한 돌봄 노동이 정서적 유대로 환기되었음을 전제하고 있다.

서로를 돌봐주는 공동체에 대한 지향은 도시정책의 ‘마을 조성 산업’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러 가지 형태의 공동체가 구상되고 꾸려지고 있는 것은 선의, 신뢰, 연대를 기반한 네트워크 속에서 보살핌을 주고받을 수 있는 공간으로의 편입을 꿈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돌봄 노동이 잘 기능되는 공동체를 꿈꾸려면 중요한 삶의 조건으로서의 돌봄에 대한 재인식이 필요하다. 보이지 않는 노동이 되어 보상과 인정 투쟁을 낳고 생태적 여성의 특질로 치부된 채 평가절하 되는 현 돌봄 가치 하에서는 돌봄 노동의 미학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꿈꾼다. 서로 감사와 호혜를 주고받으며 정서적 유대로 충만한 사회를... 그리고 나의 온전한 일상에 기여한 주변의 돌봄 노동을 흘려보낸 이기적 순간이나 돌봄을 강요했던 순간들이 있었던 건 아닌가 생각해본다. 돌봄 노동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차치하고라도 다른 사람을 돌아보고 살피는 돌봄 노동은 그 자체로 훌륭하고 아름답다. 나 역시 내 주변 사람들에게 돌봄을 받고 또 돌봄 노동을 해주고 싶다.


‘당신이 외로우면 나는 전화할 것이고

당신이 잘 못 지내면 나는 시를 보낼 것입니다.

사랑합니다.

나는 친절이라는 젖을 배달하는 사람입니다.

여분의 젖을 남길 것입니다.

-빌리 브래그


(*) P와 K의 사례는 주변 지인들의 사례를 인용하였다.

[참고자료]

낸시 폴브레 지음, 윤자영 옮김, 2007, 『보이지 않는 가슴』, 또 하나의 문화
<성 주류화 정책 패러다임의 모색: ‘발전’에서 ‘보살핌’으로> 허라금, 한국여성학회지, 2005
<‘노동의 인간화’에 대한 여성주의적 연구-일과 삶의 균형을 중심으로> 여명희, 2007
덧붙임

무다 님은 언니네트워크 운영지기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