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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네 방앗간] 바로 오늘, 바로 당신과 함께

몇 년 전 스웨덴에 살고 있는 친구가 그 곳에서 개최되는 퀴어퍼레이드 소식을 전해주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10만 명이 넘는 퍼레이드 참가자 수보다 더 부러웠던 건, 퀴어퍼레이드 기간 중에 버스와 지하철의 수많은 정류장, 관공서 등 ‘공공의 장소’에서 무지개 깃발이 걸려 파란 하늘 위에 나부끼고 있는 모습이었다. 많은 성소수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서로를 확인하고, 많은 사람들 앞을 걸으며 자긍심을 북돋고, 다른 사람들에게 용기 내어 손을 내미는 그 시공간을 후원하는 대표적인 단위는 버스 회사, 지하철 공사, 시 등 공공기관이었다. 나는 “‘저런 거리’에서 걸어볼 날이 있을까?” 회의했었다.

그리고 지난 6월 1일, 올해 한국에서도 어김없이 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2013년, 14회, 종로 거리에서 온 몸이 흠뻑 젖을 정도의 장대비를 맞으며 처음으로 참가했던 2004년 제5회 퀴어문화축제와 다르게 해가 쨍한 토요일. 언니네트워크의 퀴어 부스를 준비하기 위해 퀴어문화축제가 열리는 홍대 걷고싶은거리 번화가를 걷던 그 날, 상가 곳곳에 걸려 있던 무지개 깃발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니, 이런 진부한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아마 나는 그 날의 이질적이고 설레는 감각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내가 떠올렸던 ‘그런 거리’에서 조금도 모자라지 않았던 그 풍경을.

퀴어문화축제 때 참여자들과 함께 편지쓰기를 한 엽서

▲ 퀴어문화축제 때 참여자들과 함께 편지쓰기를 한 엽서


조금 더 특별했던 퀴어문화축제

매년 참가하던 퀴어문화축제이지만,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올해는 유독 감회가 남달랐을 테다. 마포구청에 의해 마포레인보우주민연대의 퀴어 현수막 게시가 거부된 사건, 김한길, 최원식 의원의 차별금지법안 발의 철회와 끊이지 않는 보수기독교 세력의 ‘폭력’, 민홍철 의원의 군형법 제92조6의 ‘동성애 간음죄’ 개정 발의 시도, 일상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성소수자 혐오발언과 편파적인 언론보도까지…. 그 어느 때보다도 격렬한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의 (물결도, 파도도 아닌) ‘해일’ 속에서 열린 퀴어문화축제, 그 의미를 이 사회는, 공동체는 알 수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를 ‘평화’가 아닌 ‘갈등의 가시화 과정’로 이해한다면,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의 가시화는 민주주의의 출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 민주주의의 조건에 대해서 더 고민해야 할 책무가 있다. 최근 호모포비아 발언을 담은 연달은 언론기사들은 평소 분노와 불평불만을 쏟아내지 않으면 삶의 의미가 없는 나 같은 사람조차도 입을 다물게 만들 정도였다. (참고로 나는 ‘동성애에 비판적’이라는 이준석 새누리당 전 비상대책위원의 글이나 ‘동성애 합법화’를 반대한다는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의 글이 ‘호모포비아’라는 비판을 맞이하기 전에, 문장 성분의 호응조차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한국 고위층의 ‘지식없음’에 대한 비판을 듣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나는 그 보다 ‘더’ 심각한 부정의에 분노한다.

‘동성애’의 ‘동’자만 등장해도 ‘표현의 자유’부터 튀어나오는 앙상한 논쟁(“나는 그들로부터 고루하다는 비난을 받을 각오로…”)에 쏟을 에너지 따위는 없다. 내가 분노하는 지점은 단순히 동성애 증오(혐오라는 말보다 정확한 표현이다)를 공개적으로 표현하고 표명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이 가진 동성애 증오를 마치 한낱 개인의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차원으로 제한하고(“‘막연히’ 뭔가 자연스럽지 않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나는 솔직히 동성애는 자연의 순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속마음으로는 동성애 합법화에 거부감을 가진 것으로 안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효과와 이득을 충분히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심리학자 고든 올포트가 증오를 “다른 사람이나 집단에 대한 공격적인 충동이 오랜 기간 구조화된 복잡한 감정”이라고 ‘증언’하고 있듯이, 증오는 사회문화적인 가치와 맥락에 따라 형성되는 정치적인 태도와 감정, 혹은 그 모든 것의 총합이다. 하지만 이 증오가 개인적인 것, 개별적인 것, 그래서 단선적인 것으로 탈정치화 될 때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해소하는 방법은 개인적인 윤리의 실천(매너, 배려, 예의, 관용…)으로 축소되고, 차별을 방지하는 방법은 불쾌함이나 반감을 느끼는 개인이 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개인의 존재를 참거나, 용인하거나, 포용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 개인이 참거나, 용인하거나, 포용하지 못하는 불쾌감 혹은 거부감을 느꼈을 때에는? 그때 폭력은 너무나 쉽게 정당화된다. (동성애에 막연한 거부감을 갖고 있고 그래서 비판적이고, 그래서 반대하지만 그들을 차별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은 들을 때마다 비웃음을 참기 힘들다. ‘우리는 증오 집단이 아니라 사랑 집단’이라고 말하는 KKK단을 바라볼 때의 기시감.)

당신들의 책무, 증오를 직면하는 것

나는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해, 한국사회에 만연하는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규제하는 문제에 대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논의,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어떤 주장에 공감한다. 하지만 그 논의의 ‘조건’과 ‘출발점’은 누가 만들 수 있는가? 아니, 무엇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논의’인가?

성소수자의 존재를 삭제하고 부정하고, 존재방식 대해 훈계하는 비성소수자들의 ‘표현’은 성소수자들에게는 ‘자기검열’의 다른 말이다. (‘표현의 자유’가 그것을 주장하는 사회적 주체에 따라 개념과 의미가 달라지는 상대적이고 맥락적 권리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는 여기서 더 하지 않겠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성소수자들은 자신들이 경험하는 차별과 억압의 스토리에 비이성애자들이 압도되어 입을 다물어 버릴까봐 ‘지레’ 걱정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 걱정 때문에 자신들의 존재에 대해 침묵하거나 변명하기를 바라지도, 자신들이 경험한 차별이 일상에서 분리되어 사회적으로 ‘승인되는’ 폭력의 범주에서 배제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또한 “추상적인 증오를 추상적인 사랑으로 대체”하가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데릭 젠슨). 이러한 자기분열에 대해서 한국사회는 도대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나? 아니, 이해받기 위해 충분히 ‘논의’가 되기는 했나? 이런 부정의에 대한 분노는 감정적이고 비이성적인가?

구체적인 사회적 조건에 대한 고민이나 제안 없이 합리적인 개인들의 이성 혹은 선의에 기대어 사회적 합의 운운하는 글들을 볼 때마다 내 몸은 급성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 이에 대한 마리아 루고네스와 엘리자베스 스펠맨은 지적은 한국사회의 폐부를 찌른다. ‘지배 그룹의 특권 중 하나는 특권이 적은 집단의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지 않을 자유’다. 우리는 이런 부당하고, 비합리적이고, 불온한 이 말도 안 되는 자유(‘범죄를 저지를 자유’?)에 대해 충분히 분노하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이미 공정하지 않게 세팅된 공간에서 어떤 목소리의 ‘볼륨’이 커야 하는가는 여전히, 너무나 중요하다. 공적 공간에서 성소수자에 대해 ‘막연한 거부감’을 가진 이들의 (“프랑스물이 흠뻑” 들어 자신을 마치 볼테르라고 착각하는) 자아도취적 볼륨이 큰 이유는 ‘애쓰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너무 큰 까닭이다.

성소수자들이 퀴어문화축제와 같은 공간에서 자신들의 존재와, 정치와, 사랑과, 분열과, 삶에 대한 절망과 열정을 드러내며 한국 사회와 그 구성원들에게 요청하는 것은 성소수자에 대한 ‘추상적인 사랑’이 아니다. 그건 바로 ‘막연한 거부감’을 가진 사람들이 그 증오라는 감정의 정체와 역사를 구체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직면하는 것, 그래서 그 감정을 초월하기보다 개입하는 것이다. 나는 그들의 ‘여유’나 ‘관용’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증오에 대해 치열하게 사유하기를 기대한다. 그때, 우리는 대화할 수 있다.

이성애자의 지지글

▲ 이성애자의 지지글


바로 오늘, 바로 당신과 함께

퀴어문화축제를 ‘그들만의 축제’ 혹은 ‘성소수자들의 (이기적인) 정치 집회’로 폄하하는 평을 종종 접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성소수자들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거나 낯설어하는 비성소수자들을 향해 더 친절하게, 더 포용적인 태도로 설득할 것을 매우 자주 요청받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분노, 자신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열망, 타인에게 이해받고 싶은 마음, 사회구성원으로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 그래서 인간 대 인간으로서 대화하고 싶다는 바람과 시도, 이 모든 것이 없다면 14년 동안의 퀴어문화축제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14년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성소수자 인권 운동에 함께 했던 사람들이 없었다면, “뒤에 괴물이 따라 와도 모르고 앞에 장애물 있는 것도 못 와요. 같이 걸어요(21살 이성애자 드림)”라며 손을 맞잡아주는 누군가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진정, ‘우리에게 누가 있겠는가’.

글을 쓰면서 내가 삶에서 마주하는 순간의 기쁨, 숨겨진 빛을 느끼는 만큼 잘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이, 더 자주 그 기쁨을 느끼게 되길 바란다. 오랜 기간 헌신해 온 성소수자 및 여성, 인권 단체들과 개인 활동가들, 기나긴 행렬에 함께 했던 얼굴을 기억하고 싶은 5천여 명의 ‘누군가’들, 그리고 무엇보다 퀴어문화축제를 위해 앞선 열정과 수고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준 기획단에 감사하다.

이제 누군가가, 혹은 당신이, 그리고 언젠가 더 많은 사람들이 대화를 위한 ‘수신확인’을 해 주기를.

그러나 우리에게 누가 있겠는가
타인을 얽어매는 끈에 자신 역시 묶여 있음을 성찰하는 자 외에
내일을 기다리지 않고 오늘, 바로 오늘부터 달리 살고자 하는 자 외에
우리가 누구에게 호소하겠는가
우리가 누구와 함께할 수 있겠는가
오늘 당장 변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다른 삶이란 없다
지금 여기서가 아니면 우리가 실험할 장소는 없다
당신, 행복해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당신이 아니라면 우리가 연대할 동지는 없다
기다리지 말자 바로 오늘, 바로 당신과 함께
나는 다르게 살길 원한다 (BEYOND, 1998)



[참고자료]
강준만 지음, 2013, 『증오 상업주의』, 인물과사상사
데릭 젠슨 지음, 이현정 옮김, 2008, 『거짓된 진실』, 아고라
몽, ‘혐오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뛰는 혐오, 나는 인권!” - 성소수자 혐오, 공격 넘어서기 좌담회 자료집, 성소수자 차별반대 무지개행동 주관, 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 주최, 2012년 5월 31일.
연세대학교 두입술편집위원회(준), 『두입술』, 1998년 5월 27일 창간준비호.
줄리아 우드 지음, 한희정 옮김, 2006, 『젠더에 갇힌 삶』, 커뮤니케이션북스

남재희, “동성애 합법화, ‘나를 고루하다고 해도…’”, 2013년 5월 30일, 시사IN 297호
이준석, “[2030 vs 5060]막연한 거부감과 절박함의 대립”, 2013년 6월 4일, 주간경향 1028호

덧붙임

몽 님은 언니네트워크(www.unninetwork.net) 활동가입니다.
* 이 글은 여성주의 커뮤니티 사이트 ‘언니네’(http://www.unninet.net/)의 채널[넷]에 동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