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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리] 구럼비는 국가안보를 이길 수 있을까?

이름도 예뻐서 한번쯤 혼자 소리 내어 발음해보게 되는 구럼비. 3월 7일 구럼비 발파가 시작된 후 여론에서는 어느새 ‘강정=구럼비’가 되어, 구럼비는 평화를 상징하는 실체이자 은유가 되었다. 그런데 이를 두고 이런 회의적인 질문도 있는 것으로 안다. “구럼비를 가지고 국가안보를 이기겠다고?” 라는.

이 질문은 해군기지반대 싸움이 가진 프레임의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한낱 ‘바윗덩어리’에 불과한 것이 거대한 자본, 국가, 그 뒤의 수퍼국가의 폭력을 멈추게 할 수 있는 힘이 되어줄 수 있을까 하는 의문. 이를 그냥 국가-자본주의자의 꽉막힘으로 볼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진: 구럼비 바위(출처: 강정마을회 미디어팀)]

▲ [사진: 구럼비 바위(출처: 강정마을회 미디어팀)]


구럼비와 연대한다는 것은

‘구럼비vs국가안보’의 도식은 억압받는 대상을 억압하는 주체와 대립시킴으로써 강자와 약자의 포지셔닝을 명료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구럼비가 국가안보의 대립항으로 불려나오면서 지켜야 할 대상으로 만드는 방식은 미시적인 것을 그대로 정치적 상징으로 만든다. 이러한 호명은 거시적 구조에 의한 피해를 증명하는 방식으로서만 그 존재의 의미를 갖게 만든다. 서구/남성의 대립항으로서 비서구/여성의 범주를 생산하는 것이 문제적이듯, 피해를 통한 존재 증명은 필연적으로 약자가 가질 수 있는 다양한 위치와 관계들을 가리게 된다. 마찬가지로 구럼비와 강정주민이 단순히 대립항 속에서 약자의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성을 구축하는 원리가 되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구럼비의 무엇과 연대할 것인가? 또 구럼비와 연대한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것인가?

모두 알다시피 이제까지 한국사회 군사시설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지역을 군사시설 보호구역으로 일방적으로 지정하여 영토적 법칙 외의 영토 즉, 치외법권(extra-territoriality) 지대를 만들었다. 이때 영토에 대한 주도권은 당연히 국가에 귀속되기에, 이러한 국가주의적 토대 위에서 시민들은 이 문제에 개입할 수 없었다. 통로를 갖기 어려웠다. 이후 한국 경제 수준이 어느 정도 높아지면서 군사시설 대상지역에 대한 재산권 분쟁, 국가가 일방적으로 위협인식을 하기 힘든 안보환경의 변화 등으로 군사시설물이 개발담론을 통해 건설되기 시작했다. ‘민군복합형관광미항’이라는 역사에 전무후무한 이름의 해군기지는 이러한 시장-안보(market-security)국가(정희진, 2011)의 복합적인 산물이다. 분명 로컬(지역, 구체적 장소)에서 뚝딱뚝딱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나, 그 장소의 이해와는 무관한 탈-장소적인 매끈함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장소(place)를 동원/배제하여 공간과 인간이 맺고 있는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제거하는 것이 현 국방담론의 핵심이다.

탈-장소적인 매끈함에 대한 저항

따라서 해군기지 건설반대 싸움은 어쩌면 구럼비 파괴를 가능하게 하는 ‘매끈함’에 대한 저항일 것이다. 해군기지의 시장-안보국가적 프로젝트는 한 번도 로컬에 속해본(belonging) 적 없기 때문에 추상적이어서 매끈해질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구체적 장소에 대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고려 없이 자본과 국민국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매끈함은 실제 정착(定着)이든, 애착(愛着)이든 간에 구체적 장소에 몸이든 마음이든 부착(附着)되는 것을 통해 넘어설 수 있다.

그러면 피해의 상징으로서의 구럼비는? 해군기지 건설계획이 강정을 타겟으로 하기 전, 강정주민 입장에서 구럼비는 훼손을 통해 만들고자 하는 ‘건물’의 성격에 따라 교환가능한 자원이 되기도 하고, 대체불가능한 상징이 되기도 했다. 어떤 면에서 호텔이면 괜찮고, 군사기지면 불가능하다는 입장이 가능한 것이다. 이 차이는 무엇일까? 구체적 장소에 대한 정체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는 새로 들어오는 것과의 경합 속에 삶의 주도권을 잃지 않으면서도 보다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욕망이다. 주민들에게 마을은 생활 단위, (궨당이라 불리우는) 친족 단위이자, 경제활동 단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약자의 상징으로서의 구럼비는 이러한 구럼비를 둘러싼 주민들의 다양한 사회경제적 관계를 제거함으로써 가능해지는 도식이다. 그런 면에서 국방담론과 더불어 양자 모두 장소에 부착되어 있지 않음으로써 추상화되고, 그럼으로써 매끈해지는 결과가 만들어진다.

우리가 지금 구축해야 하는 평화란

탈식민이론가 아리프 딜릭은 전지구적 자본-국가주의의 탈장소화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장소성(placeness) 개념을 제기한다. 장소성이란 위로부터의 규정이거나 자본, 민족-국가, 지배관계에서의 위치가 없는 추상이 아니라, 매일의 삶을 조직하고 그 행동을 지배하는 것(Dirlik, 1999/2005)이다. 때문에 구럼비와 연대한다는 것은 구럼비와 함께 하는 강정주민들의 일상의 장소성, 이로 인한 삶의 운영원리에 대한 물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물음 자체가 우리를 구럼비와 강정에 발 딛게(着) 해 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지금 구축해야 하는 평화란, 고요하거나 갈등 없는 상태가 아닌, 구체적인 장소에서 지지고 볶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원리일 것이다. 그러므로 구럼비와 연대하러 강정에 가기 전, 자신의 발밑에 구럼비의 오래되고 복잡한 역사가 있는지 아닌지 부터 먼저 봐야 할 것이다. 그렇게 만날 그 복잡한 역사성과 시간성이 국가안보를 이기게 할 것이다.
덧붙임

보라 님은 평화연구활동가입니다.(purpleavenue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