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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건의 인권이야기] 파란 버스에서 ‘쌤’이 되어버린 나

사람 만나는 법 배우기

매주 금요일 밤이 되면 가는 곳이 있다. 신림역 3번 출구를 나와 걷는다. 100미터쯤 앞에 파란 버스 한 대가 보인다. 저 파란 버스의 업종은 ‘운송업’이 아닌 ‘서비스업(?)’이다. 저 버스 안에는 DVD(디브이디), 보드게임, 만화책, 간식, 심지어 밥까지 있다. 서비스 대상은 청소년이다. 사람들이 흔히 아는 ‘청소년 쉼터’의 버스 버전이다. 가출 청소년 또는 가출은 아니되 거리에서 날밤 까고 노는 게 일상인 청소년들을 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컵라면, 과자 등으로 배를 채우고 샘(선생)이라 불리는 자원활동가들과 수다 좀 떨다가 가는 청소년들이 대부분이다. 공식명칭 ‘서울시 청소년 이동쉼터’인 이곳에서 나는 올 봄부터 자원 활동을 하고 있다.

[그림: 윤필]

▲ [그림: 윤필]


‘쌤‘이 되어버린 나, 반말과 존댓말 사이

“그냥 사람 만나러 가려고요.” 3월 워크숍에서 난 그리 말했다. 하지만 막상 버스에서 청소년들을 만나고보니, ‘사람’을 ‘만난다’는 행위에는 ‘어떻게’라는 태도와 방식에 대한 고민과 내 나름의 답이 필요했다. ‘그냥’ 갔던 난 속수무책으로 무수한 혼란과 맞닥뜨렸다. 처음 했던 고민은 어딜 가나 마주치는 반말과 존댓말의 문제였다.

버스에 처음 간 날, 처음 만난 청소년들에게 첫 마디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 결정해야 했고 곧 “안녕하세요.”라고 말문을 열었다. 버스는 모든 성인 자원 활동가가 ‘선생님’이라는 위치에서 ‘아이들’을 대하는 공간이었다. 나 또한 그 곳에 ‘쌤’으로 있는 이상, 내가 존대를 한다고 해서 그곳에 오는 청소년들과 나의 관계가 동등해지지는 않는다. 존댓말은 그 정중함으로 말미암아 ‘거리’를 만드는 언어라는 것, 다시 말해 빠른 시간 안에 친해지고 많은 얘기를 나눠야하는 이 곳 특성 상 적합하지 않다는 걸 매번 느꼈다. 다른 샘들이 친근하게 말 거는 걸 보면서, 내 방식이 만드는 ‘거리’가 잘못된 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말 같은 게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관계만 잘 맺을 수 있으면 말투 따위야 뭐라고. 하지만 처음 만나는 청소년에게 반말을 쓰는 것이 대화를 풀어나가는 데 있어 더 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를 들여다봐야했다. “어디서 오셨어요?”보다는 “넌 어디서 왔어?”라는 물음이 더 대답을 듣기 편하다. 자신을 낮추는 느낌의 존대와 자신을 높이는 느낌의 반말은 대답을 요구하는 강도가 다르다.

반대로 청소년들이 존댓말 쓰는 어른을 어색해하는 것에 비해, 반말 쓰는 어른을 오히려 편하게 대하는 것 또한 생각해봐야 했다. 어른은 반말하고 아이는 존대하는 구도가 만들어내는 ‘익숙한 친근함’은 연장자 중심의 사회라는 불평등한 전통에 기대어있었고, 그 불평등에 반대한다면 낯설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가까워져야 한다. 그러니 초면부터 반말을 한다는 건, 아무리 더 친해지기 위해서라고 핑계를 댄들 성인과 아이의 사회적 위계관계를 기반으로 이 관계를 시작하겠다는 의미일 수밖에 없지 않나. 그 위계의 덕으로 편해지긴 싫었으니, 답은 간단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는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할 것.

나, 뭐가 문제지?

여기까진 잘난 척 하면서 말했는데, 실은 난 ‘안녕하세요’ 이후가 잘 안 된다. 툭 까놓고 거기 오는 청소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모르겠다. 처음부터 그랬고, 지난 주 활동에서는 특히나 다른 샘한테 걱정을 끼칠 정도로 위축됐다. 그 날 아침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가 왜 이러나, 뭐가 문제일까 폭풍 생각했다.

항상 마땅히 대화거리를 모르겠는 점이 가장 어려웠다. 가출 한 번 안 해본 나와 매일을 거리에서 사는 이들의 너무도 다른 경험 사이에서 서로에게 공감되는 대화거리가 있기는 한 걸까? 맘에도 없는 얘길 억지로 하고 싶진 않았다. 억지 대화 말고 자연스런 대화를 하고 싶다는 이상은 있는데, 그게 도통 가능해야지. 그 사람에 대해 좀 알아야 뭔가 대화할 거리를 찾을 것 같긴 한데, 그렇다고 사는 곳, 취미, 가족 관계, 장래 희망 등등 항목 별로 일일이 호구조사 하기도 민망하고. 게다가 청소년이라고 매일같이 가정 문제 물어보는 것도 진부한 것 같고. 대화를 하기도 전에 내 안에서 거르는 게 너무 많았다.

회의 때 ‘청소년 이용자에 대한 서비스 제공’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활동 하면서 처음으로 거리 캠페인을 갔을 때 기억이 났다. 낯선 사람들에게 무턱대고 가서 전단지 내밀면서 청소년들이 어쩌고 얘기하고, 가끔은 서명해달라고 설득하느라 진을 빼고. 반응 없는 상대에게 말을 걸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퍽 힘들었다. 무관심한 사람들 틈바구니에 치여 조금 울고 싶은 맘이 들 정도로. 거기서 내가 했던 게 ‘감정노동’이란 걸 나중에 알았다. 쉼터에서 내가 그간 쿨한 척 하면서 안 하려고 했던 것, 그러고 보니 이거였다.

사람을 만난다는 ‘노동’에 대해

활동 끝나고 새벽 회의할 때 보면, 다들 이래저래 후회하는 것들이 많았다. 가출한 여자애들이 있었는데 속옷을 못 줬다, 간식을 많이 못 챙겨줬다 등등. 순간적으로 ‘아…….’ 하는 느낌이 있었다. 나도 옆에서 가출 했다는 얘기는 똑같이 들었는데, 왜 저런 생각은 못 했을까. 버스에서 난 뭘 보고 있었던 걸까. 쉼터 활동을 하기로 하면서 내가 만나기로 한 게 정말로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청소년’이라는 그들의 이름표였는지. 버스에 오는 청소년들의 짙은 화장, 밤이면 클럽에서 노는 일상과 같은 ‘나와의 다름’을 의식하고, 또 그들과 나의 거리를 재고 있을 동안, 다시 말해 내 관심을 온통 자신의 난처함에 쏟고 있을 동안, 다른 자원활동가들은 눈앞에 앉은 청소년들과 얘기하고 있었다. 가출한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한 지 헤아릴 만큼 그들을 보고 있었다. 애들과 얘기하기 위해 옆 자리 대신 애들 앞에 앉아서 얘기한다는 어떤 자원활동가의 노하우는 그 사람이 평소 타인을 만나는 태도(마주보기)와 관계에 대한 노력이 그런 식으로 체화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편한 것들이 잔뜩 있는 그 버스 안에서 나는 심통 나 있을 때가 많았다. 그러다 처음으로 다른 샘들이 그 버스 안에서 얼마나 애(마음) 쓰고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좀 반성했다. 나에게도 얼굴 마주 보고 얘기할 수 있도록 앞에 앉아 얘기하는 그런 노하우가 생기면 좋겠다. 마음 쓰는 노동 하면서 내 몸에 베어드는 그런 습관들이, 혼자가 편한 내게도 하나 둘 생겨나기를.
덧붙임

엠건 님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