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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핵신화를 넘어] 핵을 막는 사람들

영광에서 25년째 핵발전과 싸우는 김용국 님을 만나다

25년째 반핵운동을 하며 주민들을 만나고 정부관계자들을 만나면서 핵발전 신화를 깨려 했던 영광핵발전주민대책위 김용국 위원장님을 만났다. 그를 만난 곳은 서울에 있는 환경운동연합 사무실, 비가 오락가락해서인지 먹구름이 짙은데 플래카드가 눈에 들어온다. “방사능 비를 맞지 마세요.” 일본 핵발전소 사고 이후 방사능 피해에 대한 우려가 느껴진다.

거리에 많이 나서서인지 얼굴이 까무잡잡하다. 그에게 핵발전소가 있는 영광지역에서의 어려움들, 핵발전의 문제 등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는 1986년 체르노빌사고 이후로 가톨릭 농민회에서 반핵운동을 시작하게 되었고, 핵발전 반대운동을 줄곧 해왔다고 한다.

영광핵발전주민대책위 김용국 위원장

▲ 영광핵발전주민대책위 김용국 위원장


독재의 유산, 전기 만드는 공장인 것으로만 알아

“영광 1,2호기가 들어올 당시에는 주민들의 의견도 묻지 않고 들어선 거예요. 특별히 어떤 의견수렴 단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몇몇 사람들에 의해 여러 이야기가 돌았지요. 예를 들어 ‘영광에 발전소가 들어서면 영광도 시가 된단다.’ 뭐 이런 소문들이 났어요. 발전소를 6기나 건설하면 건설비가 들어오고 거기에서 벌어먹을 수 있지 않겠냐는 이야기들이 회자되었지요. 당시에 사람들은 원자력 발전이 무엇인지, 핵 발전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어요. 그저 ‘전기를 만드는 공장이다’라는 정도로만 알았던 거지요. 그렇게 모르는 상황에서 원전이 들어선 거예요. 월성이나 고리 발전소는 78년도부터 만들어졌지만 아무 이야기도 못하는 독재 시기니까 쉽게 발전소를 만들었던 거지요. 한국에서 반핵운동은 체르노빌 사고 이후지요.”

전라남도 영광에는 총 6기의 원자력 발전소가 있다. 1호기는 1981년 착공하여 1986년 준공, 상업 가동했다. 영광에는 한국전력이 공식적으로 평가하는 원자력 발전의 2단계부터 4단계에 해당하는 핵발전소가 모두 있다. 그만큼 핵발전 관련 이슈가 계속 나올 수밖에 없는 곳이다. 1단계는 외국기술에 의존하여 1978년에 준공을 마치고 상업운전을 한 고리원자력 1호기, 2단계는 1980년대에 추진되었던 고리원자력 3, 4호기와 영광원자력 1, 2호기 및 울진원자력 1, 2호기의 건설기간으로 기술축적기이다. 2단계 때 핵발전소 건설은 종래의 일괄발주방식에서 한 걸음 나아가 분할발주방식(Non-Turn key)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종합설계용역, 원자로설비 공급, 터빈ㆍ발전기 공급, 원전연료 공급, 보조기기 구매, 시공 등 분야별로 전문업체에게 분할 발주계약을 한다. 3단계는 1980년대 중반 영광원자력 3, 4호기와 월성원자력 2, 3, 4호기 및 울진원자력 3, 4호기를 건설하는 기간으로 한국형표준원자로 설계가 확립된다. 4단계는 2000년대 초기에 건설되는 영광원자력 5, 6호기와 울진원자력 5, 6호기 및 KEDO 원전 건설 이후의 시기이다.

체르노빌 이후 알게 된 핵발전소의 위험과 반핵운동

한국에서 1986년 체르노빌 사건으로 위험이 사회적으로 알려지면서 대중적인 반핵운동이 시작된다. 영광에서 반핵운동은 87년 전남 영광주민들의 어업피해 보상투쟁으로 가시화되었다. 당시 민주화투쟁과 나란히 가면서 지역주민들이 참여도 많이 했다. 88년 고리 원자력발전소에 10년 근무한 한국전력 기술안전 총괄부장인 박신우 씨가 임파선암으로 사망하자 핵발전 문제가 사회적으로 공론화되었다. 그 힘이 서울로 올라와서 투쟁을 하는 힘이 되었고, 88년 12월 지역주민과 연대하여 서울에서 “반핵평화 시민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당시에 호응도가 높았지요. 80년대는 대의나 명분이 옳으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상황이었고, 민주화운동과 연계되면서 사람들의 참여가 많았어요. 농활을 오는 학생들도 대거 참여했고요. 당시 공추련(공해추방운동연합회)의 최열 씨나 서진옥 씨도 같이 했지요. 문화행사도 열어서 운동이 활발했고, 가톨릭 농민회 등에서 토론회나 집회 등을 하였지요. 그전인 70년대 80년대 초반에는 가톨릭 농민회에서 반대성명을 내는 정도였어요. 반대운동이 사회에서 본격적으로 되지 않았으니까요.”

3․4호기 도둑용접 막기, 5․6호기 건설 저지운동

그는 영광에서 반핵운동의 시기를 3기로 구분했다. 2차 시기는 영광 3․4호기 부실공사를 비판하며 가동저지를 위한 투쟁을 했던 때로, 영광 천주교핵추방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원불교 농민회, 영광사회운동협의회, 한국농업경영인연합회 등에서 함께해서 영광핵발전추방협의회가 만들어졌다.

“영광 3․4호기는 한국형 원자로의 효시라고 부를 수 있어요. 효시가 뭐냐면 새로운 방식의 원자로라는 실험로였다는 말이지요. 최초는 울진 원자력발전소이구요. 100만 킬로와트 원자로를 처음 만드는데 그에 대한 충분한 준비도 없이 한 거지요. 원자로는 배관이 중요해요. 배관으로 시작해서 배관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부적합이 발생하자 도둑용접을 한 거지요.

처음으로 설계를 하다 보니 남거나 부족한 배관을 끊어서 붙이고 자르고 했던 거예요. 그러나 용접의 경우 320도 이상 150기압을 줘야 유지가 돼요. 이를 가압중수로형이라 하지요. 높은 온도에서 물을 끓여야 증기를 많이 얻을 수 있는 만큼 온도와 증기에 견딜 수 있도록 용접부위를 정확히 해야 합니다. 부적합이 발생하면 부적합을 교정하는데 공식적인 방식으로 하면 3개월이 걸리는 거예요. 공사 시행사가 공기(공사기간) 지연을 방지하려고 남모르게 도둑용접을 한 거지요. 97년도에 김영환 의원실을 통해 얻은 자료에 의하면 43개가 도둑용접을 했다고 해요. 그래서 91년도부터 94년까지 가동저지운동을 하게 됩니다. 당시 집회만 3백회 이상 했어요.

그 후인 94년도에는 5·6호기 건설저지운동을 하게 되고요. 당시 온배수 저감시설이 불가능한 지역인데다, 환경부에서도 조수간만의 차가 커서 해수조수의 흐름이 빠른 등 수심이 낮아서 그에 대한 대책이 마련되지 않을 경우 5·6호기 건설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결과가 나왔는데도 말입니다. 사실 영광 같은 지역에 다수기 건설한 것은 심각한 문제이지요.”


한 놈만 패자? 영광에 핵발전소가 많은 까닭

영광에 발전소가 많은 것에 대해, 정부가 이미 발전소가 있는 곳에 건설하는 것이 쉬우니까 영광에 집중적으로 건설되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실제 영광원자력발전소가 생산하는 전기는 우리나라 전체 생산전기의 12%를 만든다. (원자력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는 전체 34%)

“국민들에게 전기를 공급하려면 어쩔 수 없다, 어느 한 지역은 희생해야 한다, 라는 논리가 밑바탕에 깔린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이미 발전소가 있는 지역에 계속 건설하는 것이지요. 핵발전소는 사고가능성이 있으니 사람이 적게 사는 곳에 건설하자고 하는데 사실 핵발전소가 있는 곳으로부터 80킬로미터 안에 사는 사람은 많습니다. 월성 핵발전소만 해도 80킬로미터 안에 796만 명이 사는데 이런 것은 고려되지 않아요. 수백만의 삶을 포기하겠다는 거나 다름없지요. 인구조밀도를 생각하면 핵발전소는 안 짓는 게 맞지요.”

사회적 분열을 조장하는 핵발전 정책

영광에서 핵발전소가 지역주민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지어지고, 그 과정에서 피해도 드러났다. 89년 7월 영광 원자력발전소 일용노동자 김익성씨의 무뇌아 사산, 89년 8월 영광 원자력발전소 일용노동자 김동필씨 기형아 출산은 대표적이다. 그는 핵 발전소가 들어와서 가장 많이 달라진 점으로 사회적 분열을 꼽았다.

“사회적 분열이라고 생각해요. 찬성론과 반대론으로 갈렸지요. 정부와 사업자가 조장한 거예요. 언론과 행정력을 통해서 조장하고 나중에는 유치추진위를 통해서 조장했지요. 정부와 사업자가 작은 돈을 제공하면서 찬성론자를 만들고, 직접 지역사회를 분열시켰어요. 발전소 지역 지원법률에 따라 지원을 하게 되었는데 지원을 말 잘 들으면 주고 안 그러면 안주는 식으로 보이지 않게 분열시켰어요. 요즘에는 노골적으로 분열시키고 있어요. “발전소 지원을 받고 있는데 어떻게 반대하느냐?”는 식으로 말이에요. 국책사업 때문에 지역사회가 분열된다는 게 말이 안 되지요. 하나 해주니까 다른 하나 내놓으라는 식의 국책사업이어서는 안되지요.

사실 지원금도 장기적으로 생각하면 지원금이 아니에요. 어민들이 그동안 김 양식 사업으로 전국에서 유명했는데 발전소 가동으로 불가능해졌어요. 피해보상을 3년치 하고 끝내지만, 실제 피해와 지역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40년 이상 간다는 것을 생각 안 해요. 어선업이나 조개양식 등에도 피해가 크지만 기껏해야 도로를 깔거나 문화시설 건립이나 공공시설 투자만을 하고 있어요. 그걸로는 지역주민의 실질소득에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주민들의 삶이 변화하거나 풍요롭게 되고 있지는 않지요.”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를 염두에 두고 방재시스템을 마련해야

일본 핵발전소 사고 이후 방사능 피해대책에 대한 관심과 논의가 많다. 한국정부는 여전히 한국은 괜찮다는 말로 안심시키기만 하고 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한국에서 방사능 방재시스템이 지금 같은 개념을 사용하게 된 배경은 드리마일사고 이후라고 말한다.

“그전에는 대피 반경이 사고발생지역으로부터 7킬로미터였답니다. 그 전에는 관리와 통제뿐이었지요. 체르노빌은 30킬로미터까지 소개시켜서 이주시키는데, 우리는 도입하지 않느냐 문제제기했어요. 그때 정부는 우리는 경수로라 서방세계랑 다르다, 드리마일 사고 이상은 어렵다고 했어요. 그러나 사고 안 난다고 전제한 방재대책이 어디 쓸데가 있겠어요. 무용지물이에요. 방사선 환경영향 평가서, 비상계획서에 방사능 방재 계획이 있어요. 사실 지금은 일본 사고를 염두에 두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봐요. 일본 사고 규모를 근거로 시뮬레이션을 하고 그 결과로 대책을 만들어야 해요. 영광에서 사고 나서 바람이 불면 한반도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건데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해야 해요. 일본도 육상으로는 30킬로미터, 해상 80킬로미터니까요. 그걸 기준으로 해도 전주시청, 광주시청까지 영향을 미치니까요.”

영광은 365일 투쟁 중

지금 영광에서는 핵발전 안전성 관련한 요구를 하고 있다. 지역주민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역학조사를 신뢰할 수 있도록 주민과 공동조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중저준위 폐기물을 경주핵폐기물 처리장까지 수송하기 위한 물량장 공사허가가 나서 공사가 진행 중이지만 영광 앞바다가 수심이 낮아서 선적이나 수송이 가능한지 정보를 공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 5호기 고장 원인을 찾다가 냉각재 펌프(ICP) 구동용 모터 안에 드라이버가 들어 있었던 사건으로 안전성 검사를 요구하고 있다. 물론 그전에도 3․4․5․6호기에서 열전달 완충판(30~40cm)이 빠져나와 문제가 된 적이 있다.

“모터에 드라이버가 들어있으면 5호기는 노심냉각계통이라 배관건전성 문제가 생길 수 있어요. 5호기 원자로 밑으로 가서 하단부가 손상을 입은 걸 방치한 것이지요. 그리고 핵연료봉 파손이 됐을 텐데 확인 안 되고. (도둑용접이 발각되었을 때) 용접 조사를 공개해야 하는데 하지 않아서 생긴 문제지요. 당시 금속탐지기가 있어도 드라이버가 사라지건 확인 못했으니 어떻게 안전성을 믿을 수 있겠어요, 그러니 적어도 핵발전소에 비판적인 지역주민들이 포함된 안전성 조사단을 꾸려서 조사가 이루어져야 믿을 수 있지 않겠어요?

현재 어민단체들은(영광원전수협대책위) 온배수저감시설을 요구하고 있어요. 영광대책위에서는 사용 후 핵연료에 대한 대책 마련, 1·2호기 출력증가반대운동을 하고 있어요. 아시다시피 체르노빌 발전 사고의 경우, 상업용 발전소 비상전력 실험을 하다가 과도상태에 발전된 것이 제어 안 돼서 발생한 거잖아요. 처음 설계된 대로 출력하지 않고 출력증강을 하거나 증강 실험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아무리 공학적이 것이라고 하더라고 위험성 있으니 반대하는 거에요.”


핵발전 정책을 계속해야 하는지 자기질문이 필요할 때

25년간 핵과 맞서 싸운 그가 보고 듣고 겪으면서 내린 결론은 핵발전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 사는 곳이 발전소가 있는 지역으로부터 많이 떨어졌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이다. 일본 후쿠시마의 방사능 물질이 도쿄까지 날아간 것만 떠올려도 된다고 말한다. 더구나 핵발전 사고가 날 경우 한국경제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둬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국민에게 하고픈 말은 지금은 정부가 핵발전소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구조라는 거예요. 왜냐, 모르니까. 그 핵발전소의 구조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부도 모르는 채로 시스템이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핵 발전의 사고는 사소한 고장으로부터 사소한 인적 실수로부터 테러, 자연재해까지, 올 수 있는 가능성은 많기 때문에 안전을 장담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잘못될 수 있다는 거예요. 안전성은 불확실하다는 거지요. 그러니 불확실한 것을 하나하나 걷어내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핵발전 드라이브를 걸려고 안전하다고 하기만 하니……. 내 안전을 내가 지켜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이에요. 구체적 실천으로는 정부에게 안전을 촉구하는 거예요.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는 생각을 해야 해요. 그리고 (한국이) 핵발전 정책을 계속해야 하는지 자기질문이 필요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쓰는 중에 이명박 대통령이 대전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을 방문해 더 안전한 원전을 만들면 된다고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통령은 “일본 원전 사고가 생겼다고 해서 안 되겠다고 하는 것은 인류가 기술면에서 후퇴하는 것”, “비행기가 사고율이 낮지만 치사율은 높다. 그렇다고 비행기를 타지 말아야겠다고 하는가”라고 했다. 태생부터 핵분열이라는 방식으로, 방사능을 갖고 있는 원자력 발전소를 비행기에 비유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더욱 큰 문제는 일본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고, 피폭당해 고통 받는 것을 보고도 여전히 ‘안전한 핵은 가능하다’는 기술신화를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이 이러한 현실이니 안전한 핵 신화에 맞서 싸우는 김 위원장의 노력이 결실을 보려면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믿고 싶다. 신화를 깨는 것은 인간의 실천이라는 것을, 인간의 실천이 신화를 깨기를.
덧붙임

명숙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