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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지 않고도 함께 아파하고 연대하기 위하여

구제역 사태를 맞아 종교가 건네는 질문

인류는 지구 생태계 재앙이라는 최대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난해 11월 발생한 구제역으로 축산업 자체가 재앙을 맞은 데 이어, 이웃나라 일본은 역대 네 번째 강도의 지진으로 큰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한 쪽에서는 동물들이 산 채로 땅속에 묻혔고, 다른 쪽에서는 사람들이 산 채로 건물더미와 물속에 잠겼다. 구제역이나 지진참사에 대한 반응 중에 우리 동네는 걸리지 않아서, 우리나라에서 일어나지 않아 불행 중 다행이라는 의견들이 꽤 많아 보이는데 강 건너 불구경하듯 여길 일은 아닌 듯하다. 모든 사람, 온 우주가 한 몸, 한 혈육, 한 가족, 한 공동체라는 것이 인생의 진리요, 모든 종교의 궁극적 가르침이 분명한데 나는, 우리는, 왜 자기 몸, 자기 가족, 자기 나라의 한계 안에 갇혀 있는 것일까.

3월1일 5개종교네트워크 주최로 탑골공원에서 열린 “구제역 사태로 희생된 생명을 위한 위령제”[출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 3월1일 5개종교네트워크 주최로 탑골공원에서 열린 “구제역 사태로 희생된 생명을 위한 위령제”[출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인간 중심적인 반생명적 태도

현재까지 소와 돼지 350만 마리가 생매장되었고 조류독감으로 닭과 오리 600만 마리가 생매장되었다. 공장식 밀식축사와 사육방식, 생매장 등 인간중심적인 반생명적 태도는 반생명적 태도는 생명을 주관하는 이를 초월자, 신이라 여기는 종교의 공통된 가르침에 대한 부정이며 인간에 대한 도전이다. 나아가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어리석은 폭력이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 경전인 성경은 ‘하느님께서 땅 위의 온갖 집짐승과 들짐승을 만드셨고’(창세기 1장24절), ‘하느님의 대리자인 인간은 사람들 상호간의 관계뿐 아니라, 위임받은 자연과도 더불어 번성할 수 있도록 보호하고 지킬 의무가 있다’(창세기 1장 28절)고 전한다. 이번 구제역 사태가 생명을 함부로 다루어온 인간 탐욕에 대한 하늘의 경고이며 환경의 역습이라는 점은 지난 1월 이후 구제역 사태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모색하고 해결책을 찾고자 했던 5개 종교(천도교, 원불교, 천주교, 개신교, 불교) 네트워크의 기본 인식이었다. ‘5개종교네트워크’는 또한 이번 구제역, 조류독감이 지구가 생존을 위해 보내온 신호라 생각하였다. 아울러 지속가능한 축산을 모색하라는 요구이며 인간과 자연이 공생하는 삶의 방식을 모색하고 밥상문화를 바꾸어야 한다는 요청으로 인식하고 이와 관련된 활동을 범종교 차원에서 벌여나갈 계획이다.

지난 2월 23일 ‘5개종교네트워크’는 생매장 중심의 구제역 대처방식 개선을 촉구하며 “생매장 돼지들의 절규” 동영상을 인터넷에 공개하였다. 이 충격적인 영상은 9시 저녁뉴스에 보도되고 검색 포탈에서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르기도 하였다. 수많은 누리꾼들이 동영상을 보고 안타까움과 함께 생매장 방식의 구제역 대처에 문제제기를 하였지만 지금까지 생매장 방식이 개선됐다는 소식은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는다.

2월23일 천도교 대교당에서 열린 동영상 공개 기자회견 및 문화제 [출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 2월23일 천도교 대교당에서 열린 동영상 공개 기자회견 및 문화제 [출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생매장 돼지들의 절규” 동영상뿐 아니라 리비아 카다피 정부군의 민간인 폭격 장면, 일본 동북지방 해안가의 쓰나미 장면 등 언론 보도나 인터넷을 통한 온갖 고발 동영상을 보는 것으로 우리는 마음 아파하거나 분노한다. 그러나 의대생이었던 노신을 문학가이자 혁명가로 바꾼 것이 일본군의 동포 학살 동영상이었던 것에 대한 레이 초우의 논평처럼 우리는 혹시 아이러니하게도 보는 것의 폭력에 완전히 사로잡힌 것이 아닐까. 폭력을 직간접적으로 보는 것을 통해 고발하는 것에서 보는 것의 폭력에 사로잡힘으로써, 우리는 끊임없이 봐야만 분노하고 보지 않는 것에는 분노하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더욱 강하고 더욱 자극적인 보는 것의 폭력이라는 덫에 빠진 것은 아닐까. 구제역, 리비아 내전, 일본 지진 참사와 관련해 언론사의 ‘단독’, ‘특종’, ‘독점’, ‘속보’란 제목의 기사들이 대부분 강하고 자극적인 동영상이나 사진을 중심으로 보도되는 걸 보면 이런 동영상을 통해 우리는 분노와 연민까지도 소비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과연 소비사회라 부를만하다.

‘생매장 돼지들의 절규’를 소비하는 것은 아닌가

페이스북의 한 친구는 이러한 일련의 흐름에 대해 “시대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가며 동시대인들을 같은 목적을 추구하는 동료로 인식시키고 환기시키는 이미지를 다큐멘터리라고 하고 눈앞에서 끔찍함으로, 고통으로 그러나 곧 쾌락으로 돌변했다가 소비되어 사라지는 그것을 포르노라고 한다”고 규정했다. 나아가 “보지 않고서도 아파하고 분노하는 것, 그것은 동시대에 대한 감각이 있을 때만 가능하며 동시대에 대한 인식을 공유한 분노, 그것을 연대라고 한다. 반면 보여달라, 그러면 분노하겠다는 감각, 그것은 가장 폭발적인 것이라도 지나가면 사그러지는 쾌락”이라고 규정했는데 과연 우리들은 분노, 연민을 소비하며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동영상 공개 기자회견장 참석자들이 동영상을 보면서 흐느끼고 있다. 분노와 연민을 소비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진정한 믿음의 인간이 무엇인지를 묻게 된다. [출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 동영상 공개 기자회견장 참석자들이 동영상을 보면서 흐느끼고 있다. 분노와 연민을 소비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진정한 믿음의 인간이 무엇인지를 묻게 된다. [출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요한복음서는 예수의 제자 토마가 부활한 예수를 보았다는 다른 제자들의 말에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는 말을 전하고 있다. 이에 예수는 토마에게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을 전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이라는 주제를 삶의 화두로 삼은 이들이다. 아니 거창하게 종교적인 믿음이 아니더라도 한 번쯤은 우리 삶에서 믿는다는 것의 의미가 폭력에 볼모로 사로잡힌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한다. 보고나서 믿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더구나 보고 나서 믿음이 생겼는데도 스스로에게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 믿음은 소비된 믿음이라 불러야 맞다. 이런 연유로 믿음은 믿는 이의 삶의 변화가 전제돼야 하는데 최근의 흐름을 보면 인간의 영성은 지난 이천년간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오늘 우리 시대의 상황은 어느 때보다도 생명에 대한 종교의 역할을 요청받고 있다. 생명은 종교의 자리이다. 생명이 무참히 살육되는데도 종교가 침묵한다면 직무유기이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존중하고, 보호하고, 돌보는 일은 종교의 기본 책무이기 때문이다. 생매장 당한 동물들의 절규, 억압받거나 고통받는 가난한 사람들 존재 자체가, 부족한 줄 모르고 사는 자들, 크고 좋은 집에서 살고 싶은 자들, 크고 좋은 차를 타고 싶은 자들, 좋은 음식을 먹고 싶은 자들, 좋은 옷을 입고 싶은 자들, 소비를 많이 하는 자들, 쓰레기를 많이 버리는 자들,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에게 회개하라는 촉구와 초대가 된다. 나아가 보지 않고도 함께 마음아파하고 연대하기 위하여 우리들은 소비사회에서 어떻게 진정한 믿음의 인간이 될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덧붙임

경동현 님은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고, 구제역 관련 5개종교네트워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