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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의 인권이야기] 이렇게 생각하는 모임도 있습니다

제가 있는 곳은 <풀꽃세상을위한모임>이라는 단체입니다. 11년 전, ‘동강의 비오리’에게 제1회 풀꽃상을 드리는 것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지요. 풀꽃세상은 환경문제가 사람이 이 별의 주인이라는 오만함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화급하게 할 일이 자연에 대한 존경심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사람에게 유용한가 아닌가와 관계없이 모든 존재들이 스스로 지니고 있는 존재가치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사랑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러할 때 비로소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꽃피고 행복의 참맛을 삶에 드러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풀꽃세상에는 이러한 우리의 마음을 담은 애독 글이 있습니다. 「풀꽃세상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라는 제목의 이글은 공생을 바탕으로 한 자연과 사람의 관계와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세상을 잘 말해줍니다. 이 자리에서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자연의 일부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공생의 가치에 대하여 늘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대하듯이 자연을 대하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셀 수 없이 많은 풀잎들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런 마음을 '풀씨의 마음'이라 부르려고 합니다. 그러한 마음의 힘을 우리는 믿고, 또한 개개인의 작은 실천이 세상을 조금씩 변화시키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풀씨의 마음을 뿌리고, 함께 살아가고 있는 모든 풀씨들을 북돋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그늘을 밝음으로 채우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늘 생각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사랑하고 배우는 일'이 이곳에서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중요한 일이 중요하지 않게 취급되거나 덜 중요한 일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일들이 제자리를 찾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우리 모임은 그러므로 '실천이 수반된 조용한 마음의 운동'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명민하고도 섬세한 마음으로 이 세계의 다양한 얼개와 시각에 우리를 열어놓을 것입니다. 우리는 풀씨들과 풀씨들 사이에 흘러야할 따뜻한 관심과 친절을 증대하기 위해 애쓸 것이며, 그러한 태도만이 우리가 자유롭게 공생할 수 있는 세상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 믿습니다.

우리가 떠올리기 좋아하는 말은 검약과 감사, 부드러움과 느림, 마음의 여유와 풍요로움, 사랑의 실천 등의 말이고, 그 말들이 세상 속에서 천천히 현실화되기를 꿈꿉니다. 우리가 빠지지 않으려고 하는 상태는 타성이나 닫힌 마음, 혹은 그런 마음이 야기하는 모든 것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사랑에 빠진 연인들처럼 부드러운 <풀꽃세상>이 되기를 궁극적으로 바랍니다.

1999년 3월 30일


그러나, 16번의 풀꽃상을 10년에 걸쳐 드리며 자연에 대한 존경심을 회복하기 위해 마음을 모아 애써왔지만 현실은 우리의 바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악취와 폐수로 덮인 동강의 비오리는 지금도 그곳에 둥지를 틀고 있을까요. 5회 풀꽃상 백합조개는 새만금갯벌과 함께 빠르게 사라지고 있으며, 간이역에 10회 풀꽃상을 드렸던 마음은 천성산의 심장을 꿰뚫는 고속철도로 무너지고 철도합리화정책으로 사라졌네요. 지리산의 여린 물봉선은 지리산 댐과 케이블카로 다시 위태로운 지경에 놓였고, 마을의 정자나무아래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조급했던 탓일까요, 아님 진실한 애정이 부족했던 탓일까요. 풀꽃세상의 모습 역시 그동안 우리가 드렸던 풀꽃상의 자연만큼이나 숨죽여 있습니다. 풀씨들의 뜨거운 열정과 단합력, 애정은 한때 시민사회에서 꽤 유명했지요. 그러나 자신의 내려놓음 없는 우정과 친목이란 허무한 것, 단체와 사람에 대한 뜨거운 애착은 각자의 기대에 충족되지 못할 때, 봄눈 녹듯 아무것도 아닐 수 있음을 보았습니다. 굽히지 않는 강한 주의주장이 무리를 이루며 정의의 이름으로, 민중의 이름으로 만연하였고, 단정 짓고 낙인찍는 단호함으로 관계는, 단체는, 메말라 갔습니다. ‘이 세상이 사랑에 빠진 연인들처럼 부드러운 <풀꽃세상>이 되기를’ 바랐던 마음은 자꾸 시들어 간 것이지요.

몇 번의 이러한 일들을 보면서 어떠한 훌륭한 사상, 가치관, 신념, 주의, 주장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자기’, ‘나’를 앞세우는 좁은 마음위에 놓여 있다면 결국 빛을 잃고 말며 분노, 두려움, 좌절감 따위의 부정적 감정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풀꽃세상은 한 생명의 내려놓음에서 시작되었고 ‘나’를 내려놓고 내어줌에서 생명력을 얻었습니다. 자기 삶에 대한 일상적 성찰 없이 타인과 세상에 대한 비판과 조소가 삶의 바탕이 된다면 슬픈 일입니다. 가장 진실한 환경운동, 시민운동, 민주주의운동, 혁명운동은, 나를 비움으로써 가슴 깊이 숨어있는 ‘만물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을 세상에 흐르게 하는데서 시작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해할 만한 분노일지라도 그 독소는 독소로 남아 결국 우리 자신을 상하게 하고 독하게 함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용산참사와 쌍용차 사태를 겪으며 우리의 두 뺨을 타고 내리는 뜨거운 눈물의 실체는 원망과 적개심 보다는 떠나신 이들과 남겨진 이들을 보듬는 사랑임을, 그것이 세상을 푸르게 만드는 힘임을, 그리고 우리 모두의 실천이 바로 여기서 시작되기를 꿈꿉니다.

몇 년 전 인도여행을 할 때 ‘삐추’라는 풀을 만났습니다. 손이 채 닿지도 않았는데 맹렬하게 손을 쏘아서 무척 놀라고 아팠던 적이 있습니다. 여기 명박꽃이 있고, 조중동풀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성히 자라게 해주었네요. 누구를 탓할까요. 살짝 숨어있는, 위선에 물든 내 마음 한 자락 아닐까 고민되는 가을밤입니다.


덧붙임

이재용 님은 '풀꽃세상을위한모임' 사무국장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