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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의 인권이야기] 밥은 인권이다.

초등 5학년 딸아이를 유심히 살펴보면, 저학년 때와는 행동거지가 다른 면이 발견된다. 수줍음이 조금 많아졌다고 할까. 아빠와 격 없이 장난을 잘 치던 녀석이, 이젠 창피하니 그만하자고 한다. 피식, 웃어주긴 했지만, 조금씩 아빠와 거리가 멀어진다는 느낌을 받을 땐, 조금 섭섭하다. 그러나 어쩌랴. 커간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초등 5학년의 감수성이 이 정도면 중․고생들은 더 예민할 것이 뻔하다. 그 감수성이 상처받지 않도록 주변 사람들의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그러나 말이 쉽지, 일상적인 연습이 행해지는 것도 아니고, 감수성에 대응하는 ‘모범 정답’이라는 것이 있을 리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100명의 아이가 있다면, 100가지 감수성이 존재한다는 전제로부터 아이들을 대하는 것이 어른들의 자세일 거다. MB가 말하는 ‘국격’은 바로 이런 성숙한 사회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그런 면에서, 아이를 둘러싼 모든 환경을 세팅하는 어른들의 시각이 보다 꼼꼼할 필요가 있다. 특히 아이들과 밀접하게 생활하는 교육 현장 관계자들이나, 아동․청소년 정책을 생산하고 집행하는 행정가들은 더욱 그렇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역사회는 아이들의 감수성을 충분히 배려하지 않는다. 예컨대, 결식아동 대상으로 한 무료쿠폰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내가 거주하는 지역에도 결식아동을 대상으로 무료급식 쿠폰제를 실시한다. 무료급식 대상 아동이 급식 쿠폰을 받으려면 동사무소를 방문해야 한다. 그러면 월별로 일수에 맞춰 1식 3,500원의 쿠폰을 제공받는다. 11개 동에 지정된 음식점 45군데, 그러니까 1개동에 대략 4군데 정도의 쿠폰 사용 가능 음식점이 있고, 아이들은 입맛에 따라 음식점을 선택하면 된다. 여기까지 놓고 보면, 어느 정도 합리성을 갖춘 정책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아이들이 쿠폰을 잘 이용하지 않는다는 거다. 하나씩 따져보자. 쿠폰을 받기 위해 동사무소를 직접 방문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될까? 대부분 결식아동들은 ‘한 부모’ 혹은 ‘조부모 가정’일 가능성이 크고, ‘소년소녀 가장’일 가능성도 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동 현장을 전전긍긍해야 할 부모가 급식 쿠폰을 제때 챙기기는 쉽지 않다. 문자해독 능력이 떨어지는 조부모가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일정한 양식의 서류를 채워야 하는 조부모 입장에서는 난감한 일이다. ‘소년소녀 가장’들이 쿠폰을 받기 위해 동사무소에 가는 순간, 어린 아이가 가지고 있는 자존심은 어느 정도 버려야 한다.

쿠폰을 받으면 아무 때나 사용이 가능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저녁 식사 이외에는 사용할 가능성이 적다. 일부러 아침 식사 챙겨 먹기 위해 일찍 일어나 식당을 찾는 아이들은 거의 없다. 조금이라도 잠을 더 청하기 때문이다. 점심은 그나마 학교에서 제공되니, 아이들은 여기서 배를 채운다. 결식아동들이 학교급식을 허겁지겁 먹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녁은 어떤가? 쿠폰을 들고 식당을 찾아가는 순간, ‘나는 결식아동이에요’라는 것을 스스로 밝히는 셈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들은 주저할 수밖에 없다.

배달을 시켜먹으면 되지 않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1끼 식사를 배달해주는 식당은 거의 없다. 중국요리가 유일한 가능성일 텐데, 그래서 어떤 아이는 배를 채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장면만 먹는다. 그나마 자장면이라도 먹는 아이는 다행이다. 요즘은 자장면 값이 대부분 4,000원이다.

그래서 많은 아이들은 굶는다. 정말 그럴까? 그렇다. 정말 굶는다. 결식아동들은 또래 아이들에 비해 키가 작고 힘도 약하다. 정말 그럴까? 그렇다. 정말 약하다. 빈곤 아이들이 자주 찾는 시설에 가보라. 하루에 점심 1끼만 먹는데 건강할 리 없다. 결식아동에게 급식비를 지원한다는 것만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하면 오산인 것이다.

지역 현장에는 굶는 아이들이 있다. 그 아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오지만,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들에게 감수성을 포기하면서까지 밥을 챙겨먹으라고 주장하는 것은 옳은 자세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어른들이 더 미세하게 그들의 감수성을 보호하고 지켜주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인권정책은 보다 미시적일 필요가 있고, 현장과 밀착되어야 한다. 아이들의 감수성은 인권이고, 그래서 밥은 인권이기 때문이다.


덧붙임

김현 님은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의 연구위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