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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발언대] 레즈비언문화제 테러에 대한 짧은 단상

나는 2005년 9월 레즈비언문화제를 기억한다.
학생문화관 밖에 붙여놓았던 자보 열댓장이 갈기갈기 찢어져 바닥에서 구르고 있었던 그 새벽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 다음날, 성소수자의 상징이자 다양성을 나타내는 6색 무지개(빨,주,노,초,파,보) 걸개를 도난당해 학생문화관에 있는 모든 쓰레기통을 뒤질 수 밖에 없던 그 새벽도 기억난다. 찢어진 자보를 한 조각 한 조각 붙여나가는 동안 ‘너, 동성애자지?’라며 누군가 내 등을 찌를 것 같은 공포감이 나를 압도했다. 도난당한 무지개걸개를 찾아다니며 혹시라도 범인을 만나면 어떻게 하나 라는 불안에 저절로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 때 그 기억은, 말 그대로 ‘공포’ 그 자체였다.
그 때 나를 공포 속으로 밀어 넣은 것의 이름은 다름 아닌 호모포비아였다. 행위주체는 볼 수 없었지만 그 주체가 벌인 행위의 결과들만으로도 나는 공포감에 휩싸였다.

6색 무지개 걸개를 도난당하다

그리고 나는 2008년 9월 레즈비언문화제를 기억한다.
문화제 첫째 날 새벽 3시, 그때 나는 잠을 청하고 있었다. ‘이젠 테러가 없어야지’하는 혼잣말과 함께. 그러나 상황은 달랐다. 변날 활동가인 친구에게 문자가 왔다. 또다시 6색 무지개 걸개를 도난당했다고. 2005년도의 공포가 나를 휘감았다. 그리고 그 공포에 놓였을 변날 활동가들이 떠올랐다. 나는 당장 몸을 일으켜 학생문화관으로 향했다. 매 해 문화제 때 호모포비아에 대해서 꼭 이야기 하고 있는데 도대체 성정체성을 이유로 한 테러는 왜 이렇게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것인가. 이것은 옳고 그름의 판단을 할 수 없는 문제라고, 찬성 반대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인권의 문제라고 매 해마다 외쳐오고 있는데. 학생문화관에 가까워질수록 2005년 그 기억이 생각나서 자꾸만 주위를 둘러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느 새 몸이 자꾸만 떨리기 시작했다. 가해자가 누군지 알아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왜 이러한 행동을 지속적으로 하는지 너무나도 알고 싶었다. 그러한 행동 때문에 왜 내가 이렇게 힘들고 공포를 느껴야 하는지 듣고 싶었고, 차라리 내 자신에게 해명할 수 있다면 하고 싶었다.

그 다음날, CCTV에 가해자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번에는 뭔가 힘이 생기는 듯했다. 단순히 공포에 의한 좌절과 후퇴가 아닌 이 공포를 치유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변태소녀들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싶은 사람들>과 함께 하게 되었다. 여러 사람들이 순식간에 모이기 시작함과 동시에 학내에는 ‘레즈비언’이라는 단어가 담긴 자보를 쉽게 볼 수 있었다. 변날을 지지하는 이화인들, 자신은 레즈비언이며 기독교인이라고 자보를 통해 외치는 목소리들… 그것은 너무나 폭력적이었던 호모포비아의 양태에 맞서는 이화인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의 지지가, 목소리가 내게는 꽤나 힘이 되었고 적잖은 위로가 되었던 것 같다.
결국, 가해자3인이 소속된 근본주의 기독교를 기본으로 하는 기독동아리는 동아리대표자회의를 통해 제명되었다. 가해자들은 테러를 한 이유에 대해 종교적 신념과, 개인적 경험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한, 대표자회의 자리에서 “동성애를 반대한다.”라고 이야기 했다. 나와 다른 정체성을 인정하는 것이 어째서 반대 혹은 찬성의 입장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호모포비아에 맞선 연대의 힘

나 혼자서는 이 혐오범죄에 맞서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게 단지 활동하는 사람 몇이었다면 외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화인들의 지지와 힘을 믿고 우리는 활동을 계속 해 나갈 수 있었다. 우리의 활동을 지지한 여러 이화인들도, 그리고 나와 함께 했던 사람들 모두가 서로에게 힘을 주고받았던 시간들로 기억되면 좋겠다.

작게, <변태소녀들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싶은 사람들>의 활동은 일단락 지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앞으로 지속적인 모습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단순히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폭력적인 사건 때문에 연대하는 모습이 아닌, 일상적으로 나와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여러 사람들에 대하여 지지하는 모습으로 말이다. 그리고, 이번 사건이 이화 그리고 현 사회에서 종교신념을 매개로 한 굉장히 폭력적인 형태의 호모포비아를 조금이나마 뽑아버릴 수 있는 기억으로 모두에게 남았으면 좋겠다. 이러한 움직임과 목소리들이 2005년, 내가 가진 그 공포를 조금이나마 치유했으리라.

<자유발언대>를 빌려 드립니다.

자유발언대는 열려 있습니다. 자신의 주장을 맘껏 펼치십시오.
* 원고 마감: 매주 화요일 오후 3시
* 원고 분량: A4 용지 2매 전후
* 이메일: humanrights@sarangbang.or.kr
덧붙임

* 현박정원(레고)님은 한국레즈비언상담소(http://lsangdam.org)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