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인권오름 > 일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인권영화를?

“정말 남영동 대공분실이 국민의 품으로 돌아왔나요?”

미군기지로 멍들어 있는 용산에서 인권영화제가 열렸습니다. 민주노동당 용산구위원회 당원모임인 진보정치연구회가 6월 17일부터 18일까지 이틀 동안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인권영화제를 개최했던 것이죠. 지난 몇 년 간 여러 지역에서 인권영화제가 개최되면서 영화를 통해 당당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관객과 나누는 자리가 많이 만들어졌지만 미군기지로 멍든 용산에서 평범한 시민들이 직접 준비해 인권영화제를 개최한다니, 무척 신선하고 의미심장한 일로 보입니다. 영화제를 개최한 진보정치연구회의 포부처럼 “인권의 불모지 용산”에서 여러 “사회적 소수자와 이 시대 인권의 현주소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영화제라는 실험을 통해 서서히 꽃피었으면 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1회 용산 인권영화제 포스터

▲ 1회 용산 인권영화제 포스터



그런데 영화제를 알리는 보도자료를 보다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었습니다. 영화제가 열리는 장소가 현재 경찰청 산하 인권보호센터가 자리잡고 있는 옛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던 것입니다. 글쎄요.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서 인권탄압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인권영화제를 열 수 있다니, 이 어찌 놀랍고 감회가 새로운 일이 아닐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겠지요. 인권영화제를 주관한 진보정치연구회도 아마 이 부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 같습니다. 보도자료를 보니 “남영동 대공분실이 경찰인권보호센터로 바뀐 변화를 상징적으로 기념”하기 위해 인권영화제를 개최한다고 소개했습니다. 아마도 인권영화제가 “남영동 대공분실이 29년만에 국민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상징적으로 기념하는 자리로서도 의미가 있다는 말이겠지요. 하지만 저는 어색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평화영화제를 전쟁기념관에서 여는 것과 같은 느낌입니다. 경찰은 인권탄압의 상징과도 같은 장소였던 옛 남영동 대공분실을 경찰인권보호센터로 바꾸면서 ‘국민의 품으로 돌려보냈다’고 자평할지 모르겠지만, 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경찰은 “과거 경찰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아 인권경찰로 새 출발”하겠다며 남영동 대공분실을 폐지해 ‘경찰인권기념관’으로 바꾸겠다고 하고 여기에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를 입주시켰습니다. 이것을 두고 당시 경찰은 “우리 사회 인권탄압의 상징적 존재였던 남영동 대공분실이 드디어 국민의 품으로 돌아왔다”고 꽤나 선전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렇지만 정작 많은 인권활동가들은 이와 같은 경찰의 선전과 수사에 분노했습니다. 인권활동가들은 민주화운동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인권을 탄압해온 전국의 모든 대공분실을 폐지하지 않고 남영동 대공분실 하나만을 ‘상징적으로’ 인권보호센터로 전환하는 것은 생색내기에 지나지 않는 ‘전시행정’일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당시의 사정들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서울지방경찰청 보안 3과가 있던 장소입니다. 그런데 지난해 서울지방경찰청은 보안 3과를 없애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마치 ‘인권을 탄압해온 경찰청 보안과는 없어져야 한다’는 민주화운동의 요구를 ‘일부 수용’한 듯 했죠. 그런데 사실을 확인해 보니 경찰이 민주화 운동의 주장을 수용한 것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경찰은 보안 3과였던 남영동 대공분실을 보안 4과로 통합해 보안 4과가 있는 홍제동 대공분실로 이전했을 뿐입니다. 이 과정에서 기존 보안 4과에는 없었던 5계와 6계가 신설되면서 오히려 보안 4과가 102명이라는 비대한 수의 공안경찰들로 구성된 거대 보안과가 되어버린 것이죠. ‘남영동 대공분실’이라는 건물 하나의 용도만 다른 용도로 사용될 뿐 그곳의 기능과 역할은 여전히 남아있는데 이것을 두고 “남영동 대공분실이 국민의 품으로 돌아왔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해 10월 경찰이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인권경찰 비전선포식’이라는 행사를 열었을 때 인권활동가들은 경찰의 노력을 격려해주기보다는 그곳으로 달려가 ‘인권 없는 인권경찰’이라는 피켓을 들고 항의하는 기습시위에 나섰습니다. 인권탄압의 대표적인 장소로 활용하던 남영동 대공분실을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에 대한 진지한 반성도 없이 ‘인권경찰’이라는 생색을 내기 위해 이용하려는 기가 막힌 처사에 어찌 인권활동가들이 가만히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2005년 12월 전 허준영 경찰청장의 사퇴를 요구하며 옛 남영동 대공분실을 점거한 인권활동가들

▲ 2005년 12월 전 허준영 경찰청장의 사퇴를 요구하며 옛 남영동 대공분실을 점거한 인권활동가들



‘인권경찰 비전선포식’이 있고 한 달 좀더 지난 후 경찰은 전국농민대회에서 2명의 농민을 폭력적으로 살해했습니다. 이후에도 울산 건설플랜트노조, 청주 하이닉스노조, 평택 대추리·도두리 등 이 땅 노동자·민중의 생존권 요구를 방패와 곤봉을 앞세워 짓밟기도 했습니다. 또 최근에는 ‘평화적 집회·시위문화 정착을 위한 민관공동위원회’에 참가하면서 집회·시위의 자유를 말살하는 정책을 ‘민관합의’라는 이름으로 하나둘 내보이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대규모 집회를 사실상 금지할 수 있도록 소음기준을 대폭 강화하겠다는 대책도 있고, 불법집회 경력이 있는 단체들에 대해서는 집회 허가를 불허하는 한편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 관리하겠다는 대책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찰은 바로 지난주에도 대구 건설노동자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고 지금 이 순간에도 평택 대추리와 도두리에 장기주둔하며 주민들에게 인권침해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경찰이 자행하는 인권침해는 날이 갈수록 급증하고 있는데 이러한 문제에 대한 어떠한 시정의 노력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경찰은 인권보호센터를 내세우며 ‘인권경찰로 거듭나겠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경찰인권보호센터를 만들지 않았느냐. 우리 나름대로 인권경찰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 참아 달라” 뭐, 이런 식인 것이죠. 그러나 현재의 인권침해는 ‘참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인권을 개선시킬 의지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권영화제가 '인권경찰'이라는 경찰의 선전도구로 전락되진 않을까?

▲ 인권영화제가 '인권경찰'이라는 경찰의 선전도구로 전락되진 않을까?



경찰인권보호센터가 있다는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인권영화제가 열리는 것에 대해 우려를 감출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런 사정 때문입니다. 인권영화제라면 단지 인권을 주제로 한 영화를 통해 관객과 호흡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준비과정에서부터 이 시대의 인권과 함께 호흡해나가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만약 경찰인권보호센터가 ‘2006 활동 백서’를 펴내면서 “인권영화제와 함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꽃피운 인권-인권경찰을 향한 발걸음”과 같은 식으로 활동 보고가 된다면 또 얼마나 화가 날까요? 용산 인권영화제 준비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정말 남영동 대공분실이 국민의 품으로 돌아왔나요?”


덧붙임

◎ 손상열 님은 인권단체 경찰대응팀, 평화인권연대 소속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