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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원폭 60년 통한의 세월, 대물림되는 재앙

국가인권위 최초 조사, 원폭2세들 건강 상태 심각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자폭탄의 피해를 입은 한국인 원폭피해자의 자녀들이 같은 또래의 일반인에 비해 최고 89배나 높은 건강상의 문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원폭 2세 사망자 가운데 절반 이상이 10세 미만에 사망하였고, 이 중 원인도 모른 채 사망한 경우가 60.9%에 달해 원폭 피해가 2세 이후에까지 대물림될 수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했다.

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최영도)는 14일 이 같은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원폭에 의한 피해는 그 특성으로 볼 때 1세뿐 아니라 2세 이후에까지 피해가 미칠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며 국가 차원의 보다 면밀한 조사와 다각도의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번 실태조사는 국가인권위의 의뢰를 받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아래 인의협)에 의해 지난해 8월부터 5개월 동안 진행됐다.


원폭 2세 발병률, 일반인 비해 최고 89배나 높아

일제말기 남편이 한밤중 자다가 강제로 납치되어 일본 히로시마에서 원폭에 피폭 당한 후 실명되었으며, 큰아들 역시 양쪽 눈이 실명되어 시각장애인이 되었다며 원통해하는 어머니. [사진출처] 한국원폭2세환우회

▲ 일제말기 남편이 한밤중 자다가 강제로 납치되어 일본 히로시마에서 원폭에 피폭 당한 후 실명되었으며, 큰아들 역시 양쪽 눈이 실명되어 시각장애인이 되었다며 원통해하는 어머니. [사진출처] 한국원폭2세환우회



조사 결과에 따르면, 원폭 2세들은 같은 또래의 일반인에 비해 빈혈, 심근경색ㆍ협심증 등의 만성질환과 우울증, 정신분열, 각종 암 등의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국의 원폭 2세들 가운데 1,226명에 대한 우편설문조사 결과, 원폭 2세 남성의 경우는 ▲빈혈 88배 ▲심근경색ㆍ협심증 81배 ▲우울증 65배 ▲정신분열증 23배 ▲천식 26배 ▲갑상선 질환 14배 ▲위ㆍ십이지장 궤양 9.7배 ▲대장암이 7.9배나 높게 나타났고, 여성의 경우도 ▲심근경색ㆍ협심증 89배 ▲우울증 71배 ▲유방양성종양 64배 ▲천식 23배 ▲정신분열증 18배 ▲위ㆍ십이지장궤양 16배 ▲간암 13배 ▲백혈병 13배 ▲갑상선 질환 10배 ▲위암이 6.1배나 높았다.

또한 원폭피해자 1세 1,092 가구의 자녀 4,090명에 대한 정보 분석 결과, 이미 사망한 299명 가운데 절반이 넘는 156명이 10살 이전에 사망했고, 이들 중 사망원인조차 밝혀지지 않은 경우는 182명(60.9%)에 달했다. 생존한 2세들 중에서도 선천성 기형과 선천성 질병이 있다고 응답한 경우는 19명(0.5%)에 달했다.


생계난, 차별 위협 시달려

나아가 원폭 2세들은 빈곤과 사회적 차별의 위험에도 노출돼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26세에서 58세에 이르는 원폭 2세 47명에 대한 심층면접 결과, 절반에 가까운 20명이 직업이 없었고, 이들이 생계를 의존하고 있는 가족의 월 평균수입도 126만원 정도로 낮아 생계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또한 현재 자신이 앓고 있는 질병으로 인해 직접적인 차별을 겪었거나 결혼, 취업 등에서 차별받을 것을 우려해 배우자에게까지 원폭 2세임을 숨긴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 원폭2세에 대한 국가 차원의 지원은 전무한 실정이다. 원폭피해자에 대한 국내의 지원 사업은 대한적십자사를 통한 의료 지원에 한정되어 있을 뿐 생계 지원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그나마도 2세는 완전 배제되어 있는 상황이다. 2003년 일본 정부가 해외에 있는 원폭피해자들에게도 자국의 '원폭 피폭자에 대한 원호에 관한 법률'을 적용해 원호수당을 지급하기로 했을 때도 2세들은 적용 대상에서 배제됐다. 국가인권위 추정에 따르면, 국내에 생존해 있는 원폭 2세는 7천5백여명에 이른다.


최초의 조사, 추가 대책은 미지수

이번 조사는 한국 국가기관에 의해 이루어진 원폭 2세의 인권실태에 대한 최초의 조사일 뿐 아니라 원폭 피해가 후대에까지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그러나 이번 조사는 시간과 예산의 제약 등으로 인해 여러 가지 한계를 갖고 있다. 조사의 상당 부분을 우편 설문에 의존해 답변 내용이 실제와 다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데다, 심층면접의 대상도 적어 대표성을 갖기 어렵다는 것이다. 또 원폭피해자 1세 가운데 90%가 이미 사망한 상태여서 그들의 유자녀에 대한 정확한 정보나 자료를 확보하지 못해 조사에 참여한 원폭 2세는 소수에 불과했다.

이에 따라 국가인권위는 "향후 2세 이후에까지 미칠 건강상의 피해 문제에 대해 역학조사, 유전학적 조사 등 보다 정밀한 조사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한편, 원폭 피해자의 건강권과 복지를 위한 정책을 다각도로 검토하겠다"고 밝혔을 뿐, 보건복지부 등 다른 국가기관에 대한 구체적인 권고나 일정을 내놓지는 않았다. 국가인권위 임순영 연구관은 "이번 조사 결과는 다만 가능성을 보여준 기초 자료로서 의미있다"면서 "추가 조사의 시행 주체나 정책 권고의 발표 여부는 아직 검토 단계"라고 말했다.


의료ㆍ생계 지원 시급

반면 이번 조사를 수행한 인의협은 최종 보고서를 통해 "(원폭 2세 가운데) 제한된 일부에서도 긴급구호와 지원이 필요한 중증 질환자들이 다수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전제하고, 국가가 즉각 ▲원폭 2세들에 대한 전반적인 실태 조사 ▲정기적인 건강 검진과 관리 체계 구축 ▲중증 질환자에 대한 생계비와 의료비 지원 ▲일본 정부에 대한 사과와 배상 요구 등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일본의 경우,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원폭 2세를 대상으로 의료지원이나 건강관리를 할 수 있도록 한 조례를 만들어 시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난 2001년 5월부터는 방사선영향연구소를 중심으로 2세에 대한 건강영향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경남 합천지역의 원폭2세들과 그 가족들. 왼쪽에서 두 번째 선 사람이 원폭2세환우회 대표 김형률 씨다. [사진출처] 한국원폭2세환우회

▲ 경남 합천지역의 원폭2세들과 그 가족들. 왼쪽에서 두 번째 선 사람이 원폭2세환우회 대표 김형률 씨다. [사진출처] 한국원폭2세환우회



지난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원폭2세들의 생활상을 접해 온 한국원폭2세환우회 김형률 대표도 국가인권위가 정책 권고를 포함한 후속 대책을 내놓을 때까지 상당 기일이 소요될 것을 우려하면서 "심각한 질병과 생계의 위협을 받고 있는 원폭 2세 환우(患友)들이 존재하고 있는 만큼 '선 지원 후 규명'의 원칙에 따라 이들을 법적으로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대표는 "그동안 보건복지부는 원폭2세 문제에 대한 인식조차 없었고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고려해 대책 마련에 나서지 않아 왔다"며 국가인권위가 보건복지부를 상대로 한 정책 권고를 시급히 발표할 것을 촉구하는 요망서를 수일 내에 제출할 계획이다.

국가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함으로써 이번 실태조사의 직접적 계기를 마련한 원폭2세환우공동대책위원회(공동대표 강주성)도 조만간 시급한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의견서를 제출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