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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고근예의 인권이야기 - 돈 주고 생명을 사는 사회

많은 이들의 새해 소망 중에 무엇보다 '건강하기'가 빠지지 않을 것이다. 몸이 아픈 것은 개인에게도 고통의 시작이지만 집안 거덜나는 지름길이니, 가난한 사람들에게 '건강'보다 더 큰 새해 소망이 있을까 싶다. 게다가 가벼운 감기부터 생명을 위협하는 각종 질병까지 아픈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는 요즘엔 '건강이 최고다'라는 말은 결코 가벼이 들리지 않는다.

TV를 봐도 아픈 사람들을 소재로 한 프로그램이 매주 각 방송사마다 한두 개씩은 방송된다. 방송에는 저마다 형편이 어려운 가정에 밀어닥친 병마, 난치병 등으로 고통받는 환자와 가족들의 상황이 정말이지 가슴 아프게 그려진다. 강심장인 사람도 ARS전화 한 통 걸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사연들이다. 그런데 말이다. 이런 슬픔과 안타까움 뒤에 은근히 치밀어 오르는 '화'를 느껴본 적은 없는가? 나는 지난 2000년 의사파업 이후 이처럼 아픈 사람을 위해 한 푼 두 푼 소중한 정성을 모아 성금을 전달하는 프로그램을 보고 있으면 분노를 느낀다. 언제까지 선량한 국민만 등쳐먹는 이런 국가 사기극에 놀아나야 하는가 하고 말이다.

국가가 국민의 소중한 생명과 건강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말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처럼 당연한 이치가 어째서 이 지경에 처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어지간한 중산층도 허리를 휘∼청하게 만드는 재수 없는 중병에 걸리지 않기만을 새해 소망으로 비는 일, 이것만이 우리의 최선인가? 의사를 공무원으로 만들자는 주장은 과연 상상할 수 없는 일인가? 그렇지 않다. 최소한 교육에서 차지하는 공공의 역할만큼 의료부분에서도 국가가 담당해야 한다. 마치 물건을 사듯이 돈을 주고 생명을 사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져서는 안 된다.

민중의료연합이 발간한 책 <이윤보다 생명이다>에 소개된 영국의 의료 체험기는 이러한 분노를 한 단계 상승시켜 자괴감마저 들게끔 한다. 영국의 의료체계라고 해서 비판의 지점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입원부터 퇴원 그리고 이후 치료까지 환자 중심인 의료보장체계는 돈이 없으면 치료를 아예 포기해야 하는 우리의 의료체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부러운 것이다. 한국의 병원만을 경험한 나로서는 영국의 의료체계가 정말 그럴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 지경이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이 정도의 건강보험마저 '사회주의 건강보험' 운운하며 바꿔야 한다고 나선 의사단체들이 2월에 집회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2000년 의사파업 당시, '공분'(公憤)해 마지않았던 일이 또 다시 일어나는 것일까? 나는 이 참에 아이러니한 희망을 가져본다. 돈이 없으면 죽어야 하는 이런 평상을 뒤바꿀 만한 우리들의 분노가 모아질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병에 걸리고 병원에서 쫓겨나는 말도 안되는 일이 더 이상 운 없는 누군가의 안타까운 일로만 남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고근예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