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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긴급'구제조치, 차라리 이름을 바꿔라

[연재] 국가인권위원회 들여다보기


지난 15일,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의 이름으로 전혀 긴급하지 않은 '긴급구제조치' 결정이 내려졌다. 현재 성동구치소에 수감돼 구속수사를 받고 있는 지체1급 여성장애인 김모씨에 대한 불구속 수사를 동부지청에 권고한 이번 조치는 진정이 접수된 지 일주일만에 나온 것일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여성장애인의 고통에 대한 인권적 무지를 드러낸 대표적 결정이었다.

지난 95년 서울아산병원에서 지방척추수술을 받은 뒤 하반신이 마비된 김씨는 병원측이 지급한 미흡한 위자료와 비인간적 대우에 분노, 지난 2월 4일 병원 현관앞에서 분신을 기도했다. 그러자 경찰은 김씨를 연행, 방화미수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 그러나 김씨가 수감된 송파경찰서 유치장과 10일 검찰로 송치된 후 수감된 성동구치소에는 장애인용 화장실이 전혀 설치돼 있지 않아, 김씨는 기저귀를 착용한 채 장애인으로서의 고통과 여성으로서의 수치심을 강요당했다.

김씨의 사정을 보다 못한 친구들이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한 것이 지난 8일. 그러나 인권위가 사태조사에 나선 것은 14일이 되어서였고, 이튿날 오후 '긴급'구제조치 결정이 나왔다. 그러나 토요일 오후라는 이유로 동부지청에는 17일이 되어서야 결정문이 송부됐다. 현재까지도 이태승 담당검사는 인권위 결정의 수용 여부를 결정하지 않았고, 더구나 오늘로서 구속기간은 만료될 예정이다. '긴급'구제조치의 실효성이 거의 사라진 시점에서야 인권위 결정문이 담당검사에게 전해진 셈이다.

물론 애초에 도주나 증거인멸의 우려도 없는 김씨를 무리하게 구속한 검찰부터 비판받아야 한다. 장애인 편의시설을 전혀 갖추지 않은 경찰서와 구치소 당국도 문제다. 하지만 다른 기관도 아닌 인권위가 이렇듯 안이한 태도로 인권침해의 현장을 방치, 늑장 대응을 했다는 것은 어이없는 일이다.

진정을 접수받는 과정에서 사안의 긴급성조차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인권상담센터 직원들, 그리고 조사국의 긴급 조사를 요청하지 않은 김형완 소장의 '인권에 대한 무지와 안이한 판단'이 이번 사태의 주 원인이다. 김 소장은 "진정내용이나 언론보도, 장애인단체 관계자와의 통화 결과, 긴급구제의 필요성이 없다고 봤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김 소장이 판단하는 과정에서 김씨와 같은 중증장애인들의 목소리를 청취하는 과정은 생략됐다.

2001년 10월 중증장애인으로서 구치소에 수감된 적 있는 노들장애인야학의 박경석 교장은 "기본적인 물리적 환경도 마련되지 않은 곳에 중증장애인이 수감된다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자 이중처벌의 효과마저 갖는다. 그럼에도 인권위가 긴급구제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은 장애인 인권에 대한 무지의 소치이며, 인권위가 폐쇄적이고 관료적인 요식절차에 따라 판단했음을 의미한다"고 꼬집는다.

토요일이라는 이유로 결정 사실의 통지를 미루고, 다음주 월요일이 되어서야 서류로 결정문을 송부하는 태도 역시 피해자의 고통을 뒷전에 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이럴 바에야 '긴급'구제조치라는 명패부터 떼 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