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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보고> 동아시아 평화·인권 국제학술회의 여수대회 (상)

식민지 극복, 냉전체제 아래 좌절되다

<편집자주> 근대 이후 동아시아에서 형성된 강대국 중심의 냉전체제를 극복하고 평화로운 국제질서를 수립하는데 기여하기 위해 ‘동아시아 평화․인권 국제학술회의’는 시작됐다. 이에 따라 국가폭력과 집단학살의 문제를 식민지 지배 및 냉전체제와의 연관 속에서 바라보고, 그 진상과 원인을 규명하려 노력해 왔다.

국제학술회의는 97년 타이완을 출발해, 98년 제주, 99년 오키나와, 2000년 광주, 2002년 2월 교토에 이어, 지난 10월 17~20일에는 여수에서 열렸다. 인권하루소식은 식민지 지배와 냉전체제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국가폭력과 집단학살 문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 18일 발표된 내용을 중심으로 2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국가폭력과 집단학살은 냉전구조 형성의 결정적 기초다. 냉전구조의 형성으로 식민지 제3세계 국가에서 탈식민화는 좌절되고 자본주의 독재국가가 탄생한다. 이는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남미 등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이다.” 동아시아 평화․인권 국제학술회의 한국위원회 이영일 사무국장의 말이다. 이번 ‘여수대회’는 동아시아에서의 냉전체제 형성과 식민지 극복의 좌절 문제를 제1세션에서 다뤘다.


미․일 합작품, 동경재판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일본에 대해 전쟁의 책임을 묻는 동경재판은 침략전쟁의 책임자를 심판한 국제재판으로 유명하다. 여기서 국제검찰국은 도조 히데키 등 육군군벌을 중심으로 피고 28명을 선정했으나, 여기에 천황은 제외됐다. 소련이나 호주가 천황의 소추를 주장했음에도, 천황은 피고인에서 제외됐을 뿐만 아니라 증인으로 법정에 나오도록 요구받지도 않았다.

미국은 일본 점령정책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천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이는 소련, 공산주의의 위협이라고 하는 냉전구조 속에 이루어진 미국의 선택이었다. 일본 또한 천황 및 황실에 누를 끼치지 않는 것이 변호의 근본방침이었다. 결국 “동경재판은 미국이 주도하고 일본 보수정치가들이 협력한 합작품”이라는 것이 혜천여학원대학 우쯔미 선생의 주장이다.

46년 개정된 동경재판의 피고 28명에 대한 기소이유에서 조선과 대만의 식민지 지배에 관한 내용은 찾을 수 없다.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 등이 피고들 가운데 있었으며, 중국이나 필리핀에 대한 침략전쟁은 기소 이유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에 따라 우쯔미 선생은 “동경재판을 조선의 미국군정이나 전후 동아시아 냉전 속에 위치 지으면서 (동경재판에서) 식민지 문제를 무시한 과정을 밝히는 것은 현재에도 남아있는 과제”라고 밝혔다.


남한 탈식민지화의 좌절

동국대 강정구 교수는 “남한에서는 식민지 직접 통치로부터 벗어나긴 했으나, 조선인에 의한, 조선인을 위한, 조선사회 건설은 좌절됐다”라며, “이는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남베트남 등 동아시아에서도 보편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라고 강조했다. 탈식민화의 좌절은 남한에서만 일어난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는 뜻.

강 교수에 따르면, 미국은 식민지 통치구조와의 구조적 동맹과 친일파와의 인적 동맹을 통해서 남한의 탈식민지화를 좌절시켰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남한 단독선거를 통해 이후 남한 내에서 탈식민화를 아예 추구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친일․친미 성향의 40여개 정당․사회단체만으로 남한 단독선거가 치러졌고, 이들 단체를 중심으로 남한정부가 수립됐기 때문이다. 당시 정당․사회단체들은 모두 4백10개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강 교수는 “친일파 청산의 실패를 우리(이승만 정권)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자폐증적인 엉터리 분석”이라며,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세계 지배전략인 냉전체제의 결과로 봐야 한다”라고 결론을 맺었다.


대일 강화조약, 배제된 중국

중국사회과학원 영유목 선생은 “반파시즘 진영과 파시즘 진영의 대립은 새로 출현한 사회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의 대립으로 대체됐다”라며, “냉전체제의 형성은 의심할 바 없이 일본 군국주의의 전쟁 책임을 벗겨주는 외부조건을 창조했다”라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3천5백만 사상자와 5천억 달러의 재산손실을 입은 중국은 전쟁의 최대 피해국이었음에도, 가해국 일본에 대해 전쟁 책임을 청산할 수 있는 가장 유리한 기회를 상실했다.

일본 침략전쟁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기 위해 51년 연합국과 일본 사이에서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가 열렸다. 하지만 중국은 미국에 의해 철저히 배제당했다. 영국과 소련은 중국이 강화회의에 참가해야 한다고 제기하기도 했으나, 미국의 반대는 완강했다. 결국 52년 발효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일본에게 전쟁책임을 면제해 주는 내용으로 가득 찼다.

영 선생에 의하면, 강화조약에서 일본은 전쟁범죄에 대해 진정한 반성과 사과를 하지 않았다. 또한 전쟁배상문제에 관해 “연합국이 부여한 적절한 배상과 기타 의무를 동시에 이행할 능력이 일본이 부족하다”라는 핑계로 각국은 “이후 일체의 배상 요구를 포기한다”라고 규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