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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필리핀 인권기행 ②

전쟁터, 거리의 아이들 찾아 나선 민간단체 인권교육


마르코스 대통령 시절의 인권침해를 경험하면서 얻은 교훈에 따라 1986년 코라손 아키노 정부가 들어서면서 필리핀은 '인권보장과 신장'을 우선정책과제로 선정했다. 따라서 현재 필리핀의 인권교육은 정부주도의 교육만 해도 1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셈이다.


정부 차원의 인권교육

지난해 11월 26일 필리핀의 교육부를 방문했을 때 관계자는 교육부와 국가인권위원회가 함께 만든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인권교육 교재'를 건네주었다. 1997년 교육부와 국가인권위원회에 의해 개발된 이 교재는 건강과 환경, 의사소통방법 등 기초적인 인권주제를 다루고 있었다. 교육부 관계자는 "인권보장과 증진에 인권교육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인식 속에서 정규교육 교과에 인권의 내용을 포함하게 되었고, 모든 교육단계에서 인권이 훈련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후에 몇몇 민간단체 방문을 통해 현장에서 인권교육을 하고 있는 인권·교육단체는 이 교재를 모르거나 혹은 가지고 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민간단체와의 협력체계를 갖추고 있다는 교육부의 얘기와는 달리, 정규교육 과정의 인권교육에 대해 민간단체의 참여가 극히 제한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필리핀 정부차원의 인권교육은 교육부와 국가인권위원회가 담당하고 있었다. 초등학교·고등학교 그리고 상급학교에서의 인권교육은 교육부와 고등교육위원회가, 경찰과 군대의 인권교육은 국가인권위원회가 책임지고 있는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의 한 인권교육 담당자는 "경찰과 군대 등 특수집단에 대한 인권교육, 인권침해 실태 모니터링과 인권보장을 위한 계획을 마련하는 것이 위원회의 주요 활동"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설립이 인권을 보장하고 신장시키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위원회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계속되는 경찰과 군대의 인권침해를 지적하며 "아직까지 가장 심각하고 빈번한 인권침해는 제복을 입은 사람들에 의한 인권침해"라고 밝혔다.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연대의 끈

필리핀 인권교육의 또 하나의 형태는 민간단체에서 진행하는 인권교육 프로그램이었다. 민간단체들의 인권교육 대상은 거리의 아이들, 전쟁(무슬림 무장 투쟁조직과 정부군이 전쟁 중에 있는 민다나오 섬)으로 집을 잃은 아이들과 여성, 빈곤지역의 가정 등 국가의 인권교육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발라이(BALAY:집)라는 인권단체 역시 전쟁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발라이의 활동가 카로이는 "죽음과 전쟁의 목격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심각한 정신적·경제적 상처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전쟁으로 집을 잃고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의 정신적 상처를 치료하는 활동, 생명과 평화의 중요성을 새기는 인권·평화교육 그리고 자립경제를 위한 지원과 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했다.

민다나오 섬에서 난민촌 아이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종교단체인 ECDFC의 루즈 역시 "난민들이 스스로를 방어하고 생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교육과 평화를 위한 인권교육, 그리고 난민들의 기본적 생활을 뒷받침할 수 있는 펌프, 화장실 등의 기초 시설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전까지는 군인이나 경찰의 횡포에 저항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난민촌 공동생활을 통해 교육을 받은 후 군인의 폭력에 항의하고 결국엔 사과까지 받아낸 사례를 이야기하며 민간단체의 인권교육 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정부 차원의 지원은 전혀 없다.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외국 단체의 재정적 지원이 있어 이런 민간단체들의 활동들이 가능한 것이라고 루즈는 설명했다.

필리핀 양심수 대책회의 TFDP를 방문했을 때 마침 인권교육 담당자는 인권교육 교재에 쓰일 만화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는 국가인권위원회나 교육부의 인권교육 활동에 대해 묻자, "우리와는 다른 길을 가고 있다"라고 말했다. 국가의 적극적인 의지 속에서 정규 학교교육 과정에 인권교육이 포함되었지만 실제로 인권을 박탈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교육과 효과가 미치지 못하는 필리핀 현실에서 그가 말한 민간단체의 '다른 길'이란 국가의 인권교육에서 소외된 약자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비록 외국의 지원에 절대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닌 민간 인권단체의 활동이지만 주목받지 못하는 사람들, 희생의 대상이 되곤 하는 사람들에게는 단 하나뿐인 연대의 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