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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인권시평> '행복한 왕자'와 에스끼벨과..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는 제 몸의 모든 보석을 가난하고 앗긴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기꺼이 그들 곁에 있고자 한다. 그 글의 주제는 서로 모든 것을 주고 함께 나누는 삶이 인간답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교훈을 던져주는데 있는 듯 하다.

그런데 세상에 태어나 점차 사회 속에 진입하면서 겪는 체험들은 '행복한 왕자'에서 전혀 반대의 이야기를 찾아 읽게 한다. 모든 것을 나누어준 뒤 '행복한 왕자'는 결코 고결하고 행복한 모습만은 아니다. 그는 전혀 쓸모 없고 흉칙한 고체덩어리로 변해서 내동댕이쳐지고 파괴된다. 그가 더 이상 내놓을 이로움이 없었을 때, 그는 냉정하고 잔혹하게 취급당한다.

세상은 철저하게 이익의 교환과 이익의 확장을 원칙으로 하여 존재하며, 그 원칙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의 실천은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인간의 행복이라는 이상향의 실현을 위한 노력을 포기하기도 어렵다. 후자의 노력은 전자의 원칙에 비춰보면 매우 부질없고 안타까운 꿈이다. 그 현실과 꿈 사이에 '행복한 왕자'의 비극성이 놓여져 있는 것 같다. 요즘에 와서 새삼 '행복한 왕자'를 되새겨보곤 하는데, 현실의 원칙 자체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그 원칙들을 바꾸고자 하는 노력은 꿈의 실현을 위한 실천행위일 수 있지만, 불가능함을 알면서 이상향을 꿈꾸는 원초적 상실감에서 벗어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모든 꿈꾸는 사람들이 동반하여 이루어가는 그 길의 끝에 모든 사람이 흉칙한 주검마저 마다 않는, 서로에게 '행복한 왕자'가 되는 꿈을 상정하여 본다. 그렇지 않고서는 원초적 상실감이 주는 슬픔과 고뇌를 이겨내기 힘들다. 또한 우리가 삶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은 꿈의 실현들이 축적되어 가는 과정이고, 마치 밤하늘의 북극성을 따라서 길을 떠나는 여행자처럼, 가장 멀리 깊은 곳에 있는 꿈은 삶의 방향타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난 주에는 아르헨티나의 노벨평화상 수상자이며 세계적 인권운동가인 뻬레스 에스끼벨이 한국을 찾아왔다. 그는 먼 바다를 건너와 쌓인 피로를 전혀 내색 않고서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고, 풍부한 경험을 통한 지혜로운 대답들을 들려주었다. 그는 그를 원하는 자리면 어디에나 가 있고자 하는 겸허하고 헌신적인 자세를 보여주었다. 무엇보다도, 꿈의 가능성에 관한 그의 말 한마디가 오랜 여운으로 남는다. 그는 민주주의와 인권수호는 우리 모두가 꿈꾸는 이상향이며, 그리로 가는 과정에서 고뇌하며 고통을 받기도 하지만, 공동의 꿈을 갖고 함께 나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인권문제는 '종착역이 없는,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하는 인간의 숙명적 과제'라는 것이다. 그의 오랜 체험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이러한 성찰은 꿈에 기대어 나아가는 지친 영혼들에게 소중한 공감과 확인의 기회를 주었다.

강금실 (변호사/지평법률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