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인권하루소식

<인권시평> 우리 딸들이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운다면

고백하건대 나는 가끔 남의 아이들을 대할 때는 ‘어린이 청소년의 권리조약’을 한손에 쥔 인권운동가의 얼굴을 하면서도 우리 딸들을 대할 땐 장차 이 냉엄한 약육강식 사회로 딸을 떠나보내야 할 관리자로서의 어버지 얼굴을 하고 있음을 깨닫고 소스라쳐 놀라곤 한다. 나는 이 이중기준을 극복하는 일이야말로 자녀를 가진 인권운동가에게 씌워진 무거운 멍에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인천 화재참사사건이 터졌을 때 나는 매우 광범위한 청소년들이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었다. 그런데 솔직히 나는 왜 청소년들이 술이나 담배를 금지 당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건강에 해롭다? 하지만 아이들은 누구를 위해 건강을 유지해야 하는 걸까? ‘어린이․청소년의 권리조약’ 어디에도 술 담배를 금지하라는 말은 없다. 나는 내가 인권운동가라면 그들의 주체적인 결단으로 마시고 피우는 술과 담배를 ‘금지’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인권운동가라면 우리 딸들에게도 이런 태도를 견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이 어린 딸들은 도무지 학교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것 말고는 아직 아버지 속을 썩이지 않는다. 그러나 의견표명권, 프라이버시의 권리, 여가와 오락에의 권리 같은 걸 가지고 아버지에게 ‘도전’해올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4-5년 지나면 밤에 밖에서 돌아온 딸 입에서 술냄새가 나고 옷에서는 담배냄새가 날지도 모를 일이다. “얘야 권리에는 의무가 뒤따르는 법이란다”라고 진부한 대사를 토할 것인가? 그러나 그런 설교는 속임수일 뿐이다. 어린이․청소년에게는 기본적으로 의무는 없고 권리만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청소년의 권리조약’의 요체는 어린이 청소년이 권리의 ‘주체’라는 점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그들은 자신의 결단으로 권리를 행사하면서 실패해볼 권리가 있고, 실패했다고 해서 낙오자 취급을 받지 않으며 그 실패를 딛고 다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문제는 과연 내가 (남의 자식들에게처럼) 딸들에게 느긋한 마음으로 실패를 허용해줄 수 있는가에 있다. 정말 딸들에게 실패를 허용해주어야 한다면 나는 동시에 필사적으로 실패에서 일어설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즉 뭐든지 거리낌없이 말할 수 있는 조건, 최대한의 보호를 받을 조건, 불명예스러운 처벌을 받지 않을 조건, 프라이버시가 지켜지는 조건 등등. 그것은 바로 ‘어린이 청소년의 권리조약’에 보장된 모든 권리를 그들에게 철저히 보장해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청소년들이 멋대로 술과 담배를 하면 나라가 큰일나는 것은 우리가 ‘어린이․청소년의 권리조약’을 이행하지 않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다. 우리의 사고에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