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인권하루소식

<고 류타원 데레사의 아버지 류경렬 교사의 편지 >

딸을 먼저 보낸 아빠가…

이 편지는 지난 10일 노동자대회를 마치고 경남 진주 등지로 향하던 전세버스의 사고로 딸을 잃고 자신은 백여바늘을 꿰맨 채 투병중인 류교사가 쓴 글입니다. 지면 관계상 중간에 생략하였습니다.<편집자주>

입원한 지 꼭 2주일이 되는 일요입니다.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마다하고 병원치료가 없는 틈을 타서 딸의 무덤에 다녀왔습니다. 사고 때 다친 저의 머리상처 때문에 동료들과 아내는 딸의 죽음을 알리지 말아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답니다. 박문곤 선생님의 죽음 소식과 전교조장으로 장례가 치러진다는 사실을 우연히 듣고는 아내더러 나 대신 참여해서 명복을 빌어 달라고 부탁하고는 혼자 있는 병실에서 박선생님의 명복을 빌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박선생님의 장례식을 마친 이후 위원장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저의 문병을 다녀가시며, 용기 잃지 말고 꿋꿋하게 견디어야 한다기에 "그러겠다"고 몇번씩이나 다짐했는데, 그 말씀들이 저의 딸 타원이의 죽음을 의미하고 있었음을 미처 몰랐습니다.

다음날 절대안정이 중요함과 놀라지 않겠다는 몇 번의 다짐 끝에 박선생님과 함께 타원이 장례식이 치러졌다고, 친구인 김정규 선생님이 눈물로 전해주었습니다. 갑자기 89년 저에게 "모난 돌이 정 맞는다"며 앞장서지 말라시던 말씀을 흘려듣고, 해직된 지 꼭 15일만에 나무라듯 운명하신 아버님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4년 반을 일정한 직업 없이 지내는 당신 아들을 맘 아프지만 말없이 지켜보셨는데, 이제 당신 손자마저 먼저 보내버린 저를 한없이 원망하실 어머님이 떠오르고 시골 선생이지만 처자식 굶기지는 않겠다는 작은 안도감 하나만으로 딸을 저에게 맡긴 장인 장모님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명랑한 녀석을 데려 갈 때처럼 온전히 데려오지 못한 죄책감 속에 아내 얼굴이 아른거렸습니다. 언론을 통해 가끔씩 접하는 사고소식을 우리 가족과 견줄라치다가도 몸서리치는 소름으로 상상조차 중단했던 그런 일이 바로 나에게 일어났다고는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큰 맘 묵고 나오라"는 후배의 전화를 떠올리며 설마하는 온갖 상상력으로 약한 심장을 다둑거리며 사고현장에 가던 얘기, 딸의 죽음을 확인하고자 병원 영안실에서 이영주, 김정규 선생에게 떼쓴 얘기, 절대적인 후견인을 잃고 장례식장에서 징징거렸던 장남 원형이 얘기, 화장해서 한 줌 재로 변한 내 딸 타원이 이야기 그리고 무덤에 묻었던 얘기까지 수술한 머리에 충격을 줄까 봐 남편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행여 들킬까봐 슬픔마저 감추어야 했던 고민을 제게 들려주며, 혼자 결정할 수밖에 없었던 일을 오히려 용서해 달랬습니다. 당신의 쾌유가 우리 가정의 행복이라며 오직 당신 건강만 신경써 달라며 오히려 위로해 주었습니다.(중략) (정해숙 위원장님의) 말씀대로 타원이의 밝고 맑은 명랑함이 참교육의 희생양이 되어 혹 해이해진 우리들의 마음을 다잡는 계기가 되고, 공명심과 이해타산이 없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저의 예쁜 딸 타원이’를 참교육제단에 바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듭니다.

수많은 분들의 위로 방문으로 넘긴 하루하루가 벌써 2주가 지나고 딸의 무덤 앞에 서서 첫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우리 예쁜 딸 류타원(데레사) 여기 잠들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비문의 뜻대로 우리의 딸로 승화시켜 주신 전교조 동지들께 감사드립니다. (중략) 저희 가족들은 타원이의 죽음이 순수한 희생이면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합니다. 함께 하시지 못하는 분들의 아픈 마음까지 안아주는 「나의 전교조」가 있기에 우리의 딸로 타원이를 바칩니다.

1996년 11월 24일 일요일 제일병원에서 류경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