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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한 보호감호 처분자의 한맺힌 호소>

“청송감호소의 인권유린 조사해 달라”


지난 10월말 「인권운동사랑방」으로 한 남자의 전화가 걸려왔다. 현재 서울갱생보호원에서 생활하고있다는 그는 자신이 청송보호감호소에서 당한 인권유린의 실상을 폭로하고 싶다며 자신의 과거를 털어놨다. 더불어 “내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도 감옥 내에서 또다른 고문과 인권유린에 희생당하고 있을 지 모를 사람들을 위해서”라고 밝혔다. 다음은 인권운동사랑방을 찾아와 이야기한 윤 모(42) 씨의 진술 내용과 그가 소지한 각종 통지서 및 재정신청서 복사본 등을 토대로 작성한 글이다<편집자주>.


포승․수갑에 묶인 채 집단구타

윤 씨는 이른바 일반 잡범이었다. 86년 12월 26일 특수강도죄로 구속된 그는 이미 세 차례의 절도 전과가 있는 지극히 평범한(?) 수인이었다. 양심수도 아닌 그가 감옥 안에서 끔찍한 고문을 당하게 된 것은 뻣뻣한 성격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일반 잡범에게도 인권은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지키려는 그의 노력 때문이었다.

윤 씨가 감호소에서 고문을 당한 것은 세 차례 정도이며, 그 잔혹함의 정도도 심해서 장기간의 치료와 후유증을 겪은 것으로 전했다.


감호소에서 세차례 고문

92년 8월 중순경 윤 씨는 청송감호소내 보안과 지하실에서 집단구타를 당했다. 이 때 그는 시승시갑(포승과 수갑에 묶인 상황) 상태로 맞아서 앞니 한 대가 부러지는 등의 부상을 입었으며, 두 달이 넘게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윤 씨를 구타한 것은 보안계장의 지시때문이었는데, 보안계장은 윤 씨가 “걸핏하면 공무원을 고소하겠다”고 말했다는 이유로 ‘손볼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윤 씨는 86년 자신을 조사한 경찰관을 독직폭행 혐의로 고소했으며, 그 사건으로 인해 부산지검에 출정다녀온 다음날 집단구타를 당하게 됐다.

93년 5월 29일엔 단식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고문을 당했으며, 이 사건으로 윤 씨는 여광석 소장 등 관련자들을 검찰에 고소하는 등 법적 대응까지 해나갔다. 그러나 6개월 뒤, 검찰은 관련자들에게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당시 윤 씨를 비롯한 감호자들은 “감호소내에서 사망한 김재열 씨의 죽음이 구타에 의한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하며 항의 차원에서 단식을 진행했다고 한다. 이 때 주모자로 몰린 윤 씨는 5시간 동안 구타를 당한 끝에 늑골 2대가 골절되는 부상을 입었다.

윤 씨가 세번째 고문을 당한 것은 93년 11월27일 검찰의 무혐의 통보가 나온 뒤인데, 12월 4일 대구고등법원장 앞으로 재정신청서를 제출하게 된다. 그러나 이 일로해서 20일간 잠안재우기, 가스총 위협 등의 고문을 당했고, 그 뒤 1년간 독방생활을 했다고 한다. 심지어 관리자인 전 아무개 주임은 윤 씨의 재정신청취하서를 허위로 작성해 대구고법에 발송했다고 한다.


한겨레신문․말지 검열

또한 윤 씨는 감호소 내에서의 신문검열에 항의하다 징계를 당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92년 5월경 <한겨레> 신문이 여기저기 잘려나간 상태로 들어오는 것을 외부에 알리기 위해 편지를 썼다가 발각돼 두 달간 시승시갑 상태로 독방에 거하는 징계를 받았다. 또한, 한총련 사건 이후인 올해 9월부터는 감호소측에서 <한겨레>신문과 <말>지의 구독을 아예 차단하고 있다고 전했다.


고아원출신, 16년 감옥생활

부모의 얼굴조차 모르는 그는 어려서부터 고아원을 전전했다. 초등학교에 다닐 나이에 광주, 대구, 부산 등지를 떠돌아 다녔으며, 학업은 대구동덕초등학교를 1년 다닌 것이 전부라고 한다.

13세부터 신발공장일을 하던 그는 17세 때인 72년 절도 혐의로 처음 소년원 밥을 먹게 됐다. 이후 몇 차례 감옥을 들락날락하다가 86년 특수강도죄로 3년10월형을 선고받아 청송교도소에 수감됐다.

그러나 그는 만기복역을 하고도 상습전과라는 이유로 보호감호처분을 받았으며, 그 때부터 7년간 청송 제2보호감호소에서 이전과 별다름없는 감옥생활을 하게 됐다. 악명높은 사회보호법의 적용을 받은 것이다. 윤 씨는 “재판출석도 못해보고 7년 감호처분을 받은 것은 너무나 억울하다”며 “감호제도는 사라져야 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출소 후 아직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윤 씨는 “여러 언론사를 찾아다녀 봤지만 아직 반응이 없다. 청송보호소 인권유린을 밝혀내는 일이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생각이 든다”면서도 “인권유린을 재조사해서 두번 다시 감옥 내에서 고문이 발생하지 않도록 만드는게 유일한 소망”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