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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장기수 김인서 씨 왼편 전신 마비

정부 제네바협정 위반, 전쟁포로 송환 당연

93년부터 김영태(66), 함세환(65)씨와 함께 북한송환을 요구해온 비전향장기수 김인서(68, 89년 10월 출소) 씨가 지난 7월 29일 저녁 9시경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졌다.

김인서 씨는 “이런 순간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왼편전신이 마비된 상태로 거동조차 할 수 없어 누워 지내는데, 그나마 얼굴에는 중풍현상이 미세해 대화가 가능했다. 또한 그는 이전부터 만성간염과 역류성 식도염을 앓아 오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 전선지원 사업임무를 맡아 전남 광주에 19일에 있을 12․12와 5․18 사건 선고 공판에 대해 담당 판사(서울지법 형사합의 30부 재판장 김영일)가 생중계 보도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다가, 돌연 거부의사를 밝힌 것에 대해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상임의장 이창복, 전국연합)은 9일 성명서를 발표해 생중계 허용을 촉구하고 나섰다.

전국연합은 “재판공개를 비롯한 재판지휘권은 전적으로 재판장의 고유권한”이라며 대법원 규칙을 빌미로 생중계를 불허하겠다는 태 내려와 빨치산활동을 하던 중 51년 생포된 김인서 씨는 광주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52년 4월 고등군법회의에서 20년형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에서 20년간 복역했다. 그러나 만기출소 후에도 사상전향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8년 7개월간 청주보안감호소에 수감되었다.


남한에서의 막노동 인생

89년 10월에 출소하고 난 뒤에도 일가친척이 없다시피한 상태에서, 대부분의 장기수들이 그렇듯이 그가 구할 수 있는 일자리도 공사판 막노동이었다. 처음에는 아파트 공사장에서 일을 했고, 그 뒤 2년간 장성에서 골재채취 작업을 했다. 그리고 나서 93년 6월 1일부터 올해 7월 29일까지 조선대 구내서점 점원으로 일해 왔다. 뇌출혈로 쓰러지던 그날도 구내서점에서 일을 했던 것이다.

그는 북한송환을 위해 노력해온 김영태 씨와 함께 광주 탕제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번 일에 상심했을 텐데도 김영태 씨는 “고된 점이야 많지만 침을 놓고 약을 써서 치료가 가능할 것으로 본다”며 낙관적으로 내다보았다.


북한의 두 딸 보고파

김영태 씨는 이보다도 “이제 우리는 70살을 넘어서고 있다.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당당히 걸어가야 할 사람인데, 정부가 비인도적으로 막고 있는 것”이라며 자신들의 송환성사를 위해 힘써주길 부탁했다.

김 씨를 포함한 비전향 장기수 3명은 자신들은 전쟁포로로 제네바협정에 의해 당연히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또한 김인서 씨도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될 사람이다. 억매여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국제법 위반”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93년부터 통일원, 적십자사 등으로 북송을 요청해온 것은 물론, 지난 6월 24일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통해 호세 아얄라 라소 유엔 인권고등판무관 앞으로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인권하루소식 6월25일자 참조>.

북에는 이제는 할머니가 된 첫째 딸 김하심(51), 둘째 딸 김정심(47) 씨와 여동생 2명 그리고 조카들이 김인서 씨를 기다리고 있다. 김씨의 부인은 81년 4월 먼저 세상을 떴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