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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교도소 담을 넘나든 편지들

옥살이 삼십여 년만에 처음으로 가지게 된 볼펜


김인수(대전교도소, 33년째 복역 중)씨가 민가협 회원들에게

유난히도 길었던 올 여름 잠 못 이루는 수많은 열대야를 뚫고 어느덧 겨울이 눈앞에 다가왔군요. 잘 지내셨습니까.

늘 우리의 벗으로 믿음직스럽게 지켜보고 있는 옥담 밖 멀리 바라보이는 구봉산 연봉들이 푸른 옷을 다갈색으로 갈아입더니 요즈음은 그 색깔도 엷어져 단풍의 계절도 마감되는가 봅니다.

모진 설 한풍 이겨내고 새싹 틔워서 형형색색의 꽃향기 풍기고 무성한 잎 피워 풍요한 열매 맺어서 사람들과 짐승들에게 아무 대가 없이 한없이 베풀기만 하고서 울긋불긋 단풍으로 마지막 정열을 불태우고 다름 세대를 위한 거름으로 미련 없이 한줌의 흙으로 겸손하게 되돌아가는 자연의 아름다운 생성과 소멸의 법칙을 보면서 우리들의 인생을 다시 되돌아 보게 하고 있습니다.

작은 창 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단풍든 풍경이 너무 좋아서 저런 곳을 걷고싶고 수북히 쌓인 낙엽을 밟아보고 싶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잠시나마 하였습니다.

비록 늦었지만 11월1일부터 모든 재소자에게 집필이 허용되었고 내일 구입합니다. 모레가 되면 옥살이 삼십여 년만에 처음으로 저의 소유로 된 볼펜을 가지고 방에서 기상에서 취침까지 글씨를 쓸 수 있게 됩니다.

볼펜 한 자루와 노트 한 권이 가지는 의미는 비자유속의 자유, 야만에서 문명으로의 질적 비약입니다. 이것이 박탈되었기에 시간은 많았으나 공부다운 공부를 밀도 있게 하지 못한 아쉬움을 엄청나게 컸습니다. 기뻐해 주십시오. 밖에서는 컴퓨터로 글을 찍어내는데 이제 겨우 펜이라니 문명의 이기로부터의 소외야말로 가장 큰 형벌임을 절감합니다.

뜻 있는 많은 분들이 음으로 양으로 우리들을 격려해주시고 보살펴 주시는 뜨거운 배려해 주심에 감사와 고마움을 느끼면서 저의 진심 어린 인사를 드립니다. 달구벌, 빛고을, 비사벌, 안동 친구들과 각 곳의 젊은 친구들에게도 인사 전해주십시오.

이곳은 여러분들이 염려해주시는 덕택으로 비교적 건강하게 잘들있습니다. 하지만 워낙 감옥을 오래 산 김선명, 안학섭 선생들과 환자, 노약자, 고령자들의 건강이 염려됩니다.

이곳에서 겨울은 가장 어려운 계절입니다. 그러나 작년도 재작년도 아니, 20년 30년 40년간 극복해온 것 같이 올 겨울도 극복해 나갈 것입니다.

겨울이 지나면 아름다운 꽃이 피는 봄이 있기에, 징역의 서러움과 원한으로 얼어붙은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줄 봄이 있기에, 그리고 남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서광이 비치는 요즈음 기대를 가지고 이 겨울을 이겨낼 것입니다. 곧 겨울인데 부디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94년 11월 김인수


할아버지 거기 있지 말고 빨리 나오세요

김태룡(대전교도소, 16년째 복역)씨의 외손녀 최미소 양이 김선명(대전교도소, 44년째 복역 중) 선생님께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저는 최미소라고 합니다. 설날 떡국을 먹어서 5살이 되었어요. 저는 할아버지 얼굴을 한번도 본적이 없는데 외할머니가 할아버지 얘기를 해줘서 편지 쓰는 거예요.

할아버지도 저희 작은 외할아버지처럼 아주 오래오래 감옥이라는 곳에 갇혀 있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맛있는 것도 먹지 못하고 마음대로 다니지도 못한다면서요? 할아버지도 엄마가 맛있는 것을 잘 안 사주나요. 우리 엄마처럼 혼자서 아무 데나 돌아다니면 막 야단을 치나요? 할아버지는 어른인데 누가 야단을 치지요? 저는 막 울면 엄마가 맛있는 것도 많이 사줘요. 할아버지도 그렇게 해보세요.

할아버지가 계시는 곳은 불이 없어서 손발이 꽁꽁 얼어 버린다면서요. 그러다 감기 걸리면 어떻게 하지요?

할아버지 거기 있지 말고 빨리 나오세요. 저는 외할아버지가 없어요. 그리고 우리 작은 외할아버지도 볼 수가 없어요.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할아버지처럼 추운 방에서 혼자 있대요. 그래서 엄마랑 할머니랑 같이 서울랜드도 구경가고 롯데월드도 구경가고 싶어요. 엄마랑 같이 가봤는데 얼마나 재미있는지 몰라요.

할아버지보고 싶어요. 안녕히 계셔요.

94년 2월 최미소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