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가의 편지

<새로운 자본 읽기>를 함께 읽다

올해 계획을 세우면서 상임활동가들이 함께 공부를 좀 해보기로 했다. 우리가 인권운동 해서 바꿔보겠다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조금 더 잘 알아보자는 취지였다. 각자 다른 일을 맡아서 바쁘게 움직이는데 우리가 함께 이루려는 것이 무엇일지 조금 더 차분히 살펴보자는 취지기도 했다. 활동가에게 공부란, 활동하는 동안은 늘 아쉬운, 하지만 그것까지 해야 한다면 너무 피곤한, 그런 일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시작을 했다. 처음 같이 읽기로 한 책은 미하엘 하인리히의 <새로운 자본 읽기>였다. 작년 안식년 동안 마르크스의 <자본>을 열심히 공부하다 온 정록의 추천과 제안이었다.

 

마르크스와 <자본>

 

'자본주의'라는 말은 참 흔한 말 중 하나다. 인간보다 이윤을 앞세우는 부조리함과 몰인간성을 지적할 때면 곧잘 쓰이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다른 사회에 대한 상상은 흔치 않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같은 말은 자본주의 아닌 무엇을 가리키지만 대체로 '철 지난' 몽상 취급당하기 일쑤다. 인권과 사회주의를 갖다 붙이는 건 더욱 어색한 일이다. 인권과 페미니즘의 연결은 그리 어색하지 않게 들릴 수 있다. '인권감수성'이라고 부르는 것도 페미니즘이 선사한 인식론적 전환에 꽤 기대있다. 페미니즘은 성차별에 맞서는 철학과 운동일 뿐만 아니라 모든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실마리를 내어준다. 하지만 페미니즘이야말로 섣부른 보편보다 당파성을 자임하는 철학임을 상기한다면 사회주의와의 연결에 덧씌워진 껄끄러움은 철학이나 운동 자체로부터 기원하는 것 같지 않다.

<새로운 자본 읽기>는 마르크스가 <자본>을 통해 보여준 세계를 저자의 관점에서 또박또박 짚어 설명한 책이다. <자본>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분석을 담고 있다. 노동자가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 그저 자본가의 욕심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의 내적 동학 때문임을 보여준다. 노동력이 상품으로 취급되기 시작하자 세상을 움직이고 인류의 삶을 개선하는 힘은 자본으로부터 나오는 것처럼 여겨지게 됐다. 그러나 자본은 그 내적 동학 때문에 자신을 파괴하는 - 자본이 고용한 노동/자를 파괴하는 힘이기도 한 - 힘을 지닐 수밖에 없고 이런 구조에서 인간의 해방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분석이다.

그래서 <자본>은 세계에 대한 해석에 그치지 않는다. 사회주의 운동의 한복판에 솟아오른 마르크스의 철학과 자본주의 분석은, 세계를 변혁하기 위해 자본주의 폐지 외에 방법이 없다는 주장이기도 하며, 어떻게 세계를 변혁할 것인가에 대한 구상이기도 하다. 해석으로서의 <자본>이 이후 경제학의 영역에서 연구와 논쟁으로 이어졌다면, 변혁으로서의 <자본>은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국가 건설이라는 도전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겠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드리운 껄끄러움은, 한편으로는 냉전 시대 반공의 세계화가 이룬 성과이기도 하지만, 현실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충분히 매력적이지 않은 탓이기도 할 것이다. '노동자' 중심주의나 '계급' 환원주의 같은 것들에 대한 반발심도 있을 테고 말이다.

 

사회주의와 인권/운동

 

인권운동사랑방은 오래 전 '사회주의인권론'을 함께 학습하기도 했다고 한다. 인간의 존엄을 서로 지켜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어떤 도전들이 있었는지 살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무엇이 인권의 실현을 가로막고 있으며 어떻게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이룰 것인가. 가해자-피해자, 국가-시민, 기업-노동자 등의 단선적인 대립구도는 문제를 선명하게 드러내기도 하지만 이런 구도로 인권침해와 차별이 반복되는 이유까지 설명하지는 못한다. 인권운동이 인간의 해방을 꾀하는 운동이라면 사회의 구조와 내적 동학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자본>이 보여주듯 인간의 삶은 그 물질적 조건이 형성되는 방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타인의 노동에 기대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자본주의는 노동으로부터 인간을 지우고 노동력-상품만을 '경제적인 것'으로 추출해낸다. 자본주의 사회가 필연적으로 만들어내는 불평등은 '정치적인 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결과거나 '사회적인 것'이 소멸해가는 증거처럼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먹고 일하고 친구를 사귀고 취미를 즐기는 세계는 정치와 경제와 사회로 분리될 수 없다. 우리가 일의 세계에 아무리 자아실현이나 호혜성 같은 것을 부여하려 해도 운 좋은 소수가 아니라면 그런 행운은 찾아들지 않는다. 이 세계에서 인간이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역량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격차를 따라 흐른다.

그렇다고 '자본주의가 문제'라는 말을 반복하는 것은, 글쎄, 근본적인 문제제기이기보다 무엇을 바꿔야 할지 찾아내지 못하는 한계의 반영일지도 모른다. 나는 자본주의의 폐지에 도전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한다. 아직 이뤄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앞으로도 이룰 수 없음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 폐지가 아니라면 어떤 변화도 무의미하다는 냉소를 위해 마르크스를 읽는 것은 아니다. 폐지를 향해 가는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만으로 인간의 존엄이 훼손되는 구조에 대한 이해가 완성되는 것도 아니다. 성별과 인종과 능력 등에 따른 구분과 위계는 사회가 움직이는 방식에 틀을 짓는다. 자본이 힘의 방향이라면 여러 억압구조는 힘의 모양을 만든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또 다른 공부를 이어갈 참이었는데… 다들 지쳤다. ㅋㅋ

 

또 읽고 싶…

 

마지막 세미나를 마치고 오랜만에 회식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책 한 권 읽고 마르크스의 <자본>을 이해하는 것이야 어차피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다. 각자 기대했던 것, 함께 읽은 소감, 남은 고민 같은 것들을 이야기했다. <새로운 자본 읽기>라는 책에 대한 고민보다 인권운동과 '자본주의' 또는 마르크스나 사회주의 같은 것들이 더 고민으로 남은 듯하다. 인권운동에 자본주의를 해석하고 변혁하라는 기대까지 거는 사람은 다행히도 거의 없어 우리는 조금 더 천천히 두고두고 이런 고민을 이어갈 수 있을 듯하다.

어쨌든 서로 조금씩 아는 듯 모르는 듯 공부를 도우면서 책 한 권을 함께 읽고 나니 그 자체가 주는 여운이 있다. 세계를 더 깊이 이해하고 조금 더 멋지게 바꾸고 싶은 동료들과 함께 한다는 건 즐거운 일이니 말이다. 하반기 계획이 좀 빠듯하다 보니 책 한 권을 다시 집어들기는 어려운 상황이 됐다. 하지만 다시 책을 들게 될 때는 이번 세미나의 즐거움이 떠오를 듯하다. 물론 닥치면 또 피곤하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