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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대다그대

내 인생의 글씨

어쓰

집중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며 너도나도 서예를 배우던 초등학생 시절, 방과 후 학교였는지 정규 수업시간인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붓글씨를 쓴 적이 있다. 준비물은 붓과 벼루와 먹. 문구점에서 당연하다는 듯이 액체로 된 먹을 사갔는데, 누군가가 이상한 양갱처럼 생긴 걸 가져왔다. 벼루에 물을 조금 붓고 그 양갱을 빙글빙글 돌리는 모습이 어찌나 재밌어보이던지, 교실에 있던 모두가 줄을 서서 한 번씩 해본 기억이 있다. 서예를 하는 사람들은 먹을 갈며 마음을 비우고 집중력을 올린다지만 나는 세 바퀴정도 돌려보고 재미없다며 떠났던 것 같으니, 예나 지금이나 집중력 향상은 글렀다 싶다.

 

가원

모친이 긋는 모음의 모든 획은 바람에 휘날리듯 멋졌다. 그 멋드러진 글씨체를 따라 쓰기를 즐긴 결과 내 글씨체는 바람에 휘날리는 정도가 아니라 제대로 태풍을 맞았다. 글씨체가 멋드러지게 엉망이란 소리다.

 

세주

나는 글씨 예쁘게 쓰는 걸 좋아 하는 사람이었다. 단 내가 쓰고 싶은 글자만. 시를 베껴 쓰고 읽어보고 하던 사람이다.ㅜㅜ그때만 해도 내가 쓸 수 있는 범위 내의 필기량만 주어졌는지 항상 글씨 쓰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았는데, 중학교 때 모 과목 선생이 반 전체한테 시험지 20번 베껴쓰기를 숙제로 내준 이후로 길게 무엇인가 쓰는 것에 트라우마가 생긴 듯하다. 너무해너무해. 지금 생각해도 너무 끔찍했던 기억이다. 그래도 글씨를 쓰는 느낌은 언제나 좋다. 손에 힘을 주고, 글씨를 쓰면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다. 잘 깎여진 연필로 사각사각 글씨를 쓰면 기분이 좋아진다. 붓글씨는 어렵지만... 붓글씨를 쓰는 마음들은 어떤 것일지..?

 

아해

저는 참 글씨를 못 씁니다. (라고 쓰고 괴발개발이라고 읽습니다. ㅋㅋ 옛날이면 타자기요, 지금으로선 컴퓨터라는 물건이 나와서 어찌나 다행인지요. 아마 이 '아그대다그대'도 제 손으로 직접 썼으면 읽을 수도 없었을지 모르지요. ㅎㅎ >.<)

 

어렸을 때, 종이와 먹 향기 가득한 서예학원을 다닌 적도 있고, 밭 전(田) 자로 나뉜 연습장 칸칸에 글씨를 우겨넣은 적도 있지만, 글씨는 결국 고양이발강아지발에 머무릅니다. 바로 며칠 전 제가 써놓은 것을 읽지 못해,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헤헤

 

한때는, (아마도 "괴도 루팡"쯤으로 기억하는데.) 누군가 자기는 1000의 필체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읽고, "그렇지!! 사람이라면 필체 1000개쯤은 가져야지!!" 생각하고, 필체가 주로 차이나는 부분은 어디인지, 크게 다르게 보이려면 어디를 어떻게 써야하는지 진짜로 연구하고 연습한 때도 있었지요.

 

그런데 역시 쉽지는 아니했고요. ^^ 그래서 '필체'라는 것이 존재하고, '서명'을 한 사람의 확인도구로 사용하기도 하는가 봅니다.

 

그런데, 깜짝 놀랍게도, 어쩌다 가끔은 사람들이 제 글씨가 예쁘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보면 제가 써놓은 글씨가 저의 어머님 글씨와 무척 닮았구나 생각됩니다. 거 참, 발가락이 닮은 것도 아니고, 신기하긴 합니다만.

 

그 유전적 신기함을 잠시 접어둔다면, 아무리 못 쓰는 제 글씨라고 하더라도 좀 괜찮아 보인다 싶을 때는,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일관성"이 느껴지는 때인 것 같습니다. 일단 제 글씨에서 가장 어긋나는 것은 크기의 일관성이라서 크기만 대충 맞춰도 그나마 봐줄만하게 느껴지는 그런 것? ^^

 

국립박물관에서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본 적이 있습니다. 오오~ 한글자한글자 보면 대충 휘갈긴 것 같지만, 그것들이 이어져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되었을 때의 힘은!! 그렇게 보면 추사의 글씨에는 기세의 일관성이 있다고 할 수 있겠군요.

 

서화전 "선 위에 선 : 0.75평에서 붓을 든 사람들"이라... 인권운동사랑방 어딘가에 묵혀있던 '장기수'들의 서화전을 연다고 합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서울사람들은 경복궁 안 간다고, 지나가면서 한 번, 청소하면서 한 번, 흘깃흘깃 봤을 글씨들일 텐데, 사실 생각이 잘 나지는 않습니다. 이제 그 글씨들을 서화전에서 정중하게 마주했을 때, 만약에, 장기수 선생님들의 "일관된 마음"이 느껴져 버리면, 주루룩 울어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록

난 내가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조금 쓰다보면 손가락이 금방 아파서 글씨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메모하거나 노트하는 걸 엄청 싫어했다.) 그걸 전에는 내가 글씨를 잘 쓰는데 힘이 부족해서 많이 못 쓰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알겠다. 그런 걸 글씨 못 쓰는 거라고 말한다는 걸.

 

미류

자식 셋 고등학교를 졸업시키고 나서 엄마는 붓글씨를 배우기 시작했다. 고향 집에 갈 때마다 전시회에 냈다는 작품들이 하나 둘 늘어났고, 엄마 실력도 늘어나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내게 주려고 썼다며 족자를 하나 내어주셨다. 글씨도 멋지지만 글이, 보고 또 봐도 설렌다. 그래서 사랑인가. "너는 새벽이며 반쯤 피어난 꽃이며 가지를 박차고 날개짓을 하는 새이다 활시위를 떠나 과녁을 향해 날아오르는 화살이며 얼음에서 풀려난 물방울이다" (인권운동 하다가 힘들 때 이 글 보면서 다시 힘을 낸다는 걸 알면 엄마는 뿌듯할까 후회될까 ^^;)

 

민선

지금 갈겨쓰는 나의 글씨론 짐작되지 않지만, 아주 오래 전 비뚤어진 자세를 교정하고자 몇 달 서예학원에 다닌 적이 있다. 당시 90도로 몸을 비틀며 글씨를 쓰는 게 습관이었는데, 소낙비가 내리는 것처럼 한쪽으로 쏠린 글씨를 교정해주려고 담임선생님이 글씨 하나하나에 네모 테두리를 그려주셨다. 그러다 서예학원까지 가게 됐던 건데, 자랑이지만 배운지 얼마 안 되어 나갔던 서예전에서 입선을 했었다. 조금씩 재미가 붙고 있을 때 이사를 하게 되면서 서예학원을 그만두고 이후엔 붓글씨를 써본 적이 없다. <선 위에 선> 전시회 준비를 함께 하면서, 그 선들이 장기수 선생님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어렴풋하게나마 접하며 나도 다시 붓을 들고 싶어졌다. 붓으로 찬찬히 써내려가면서 마음을 다듬어가고 조금 더 단단해지고 싶다.

 

 

올해 생일에도 친구가 보내준 엽서를 받았다. 이 친구 덕분에 나는 매년 손글씨가 담긴 생일엽서를 받고, 친구 덕분에 나 역시 서랍에만 쌓여 있는 엽서를 꺼내서 손글씨로 안부를 묻고 집 주변 우체국을 찾는다. 끝이 길게 구부러진 손글씨를 기다리는 매해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