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활동가의 편지

나의 3층 생활기 - 거리유지와 좁히기 사이에서

한번 상상해보시라. 자신이 얼마동안 아주 생경한 환경으로 보내진다면 어떤 느낌이 들지? 갑자기 외국의 어느 마을로, 어린 왕자가 살던 소행성으로 혹은 탐사를 목적으로 잠수함이나 우주선에서 장기간 체류하게 된다면? 

 평소 사회성이 썩 나쁘지 않았던(?) 나는 지난 2월부터 <인권하루소식>을 하느라고 3층에서 살게 되었다. 인권정보자료실이 있는 4층에서 3년 동안 '나홀로' 살다가 3층에서의 '공동생활'은 존재의 이동이라는 것이 주는 충격이 어떤 것인지 내게 생생하게 깨우쳐주었다. 또한 동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게 한 계기였다.

 초반에 내가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내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들리고 보고 또 그것을 참으면서 내 평상심을 유지하는 일이었다. 인권운동사랑방 성원 모두가 동의하는 바와 같이 감각적으로 둔하다고 평가받고 있는 내가 동료들에 대해 예민하게 느꼈고, 이로 인해 조금 힘들었다는 것에 대해 아마 믿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에스키모인이 눈과 얼음으로만 덥힌 곳에서 살다가 사람이 북적거리는 도시로 이사온 느낌과 흡사했다. 당시 이토록 타자에 대한 존재감이 내 삶에 이토록 강렬하게 다가온 적이 없었다. 심지어 나는 동료들의 눈을 마주치는 일조차 버거워했다. 나는 최대한 심리적인 거리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정말 애썼다. 

 그러나 물리적 공간에서 오는 간극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속에서 심리적 거리감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았다. 가령 <인권하루소식>공동편집자였던 근예 씨와의 거리는 30센티미터가 되지 않았고, 기자들과의 거리 역시 1미터를 넘지 않았다. 각자가 느끼는 사람들 사이 최적의 거리란 매우 상대적이긴 하지만 3층 생활은 나와 타자간의 거리를 유지하기에는 너무 가까웠다. 게다가 일하고, 쉬고, 먹고 하는 일들을 별다른 공간 구분 없이 한 공간에서 이뤄지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3층 생활은 그만큼 내가 동료들과 하나라는 느낌을 갖게 했다. 하지만 하나라는 느낌은 때론 심리적인 균형을 잃게 하거나 지나치게 타자와 나를 동일시하는 오류를 낳게 된다. 원자들의 세계에서도 서로를 유지할 공간이 필요하듯이 인간인 우리에게도 서로를 객관화할 수 있는 물리?심리적 거리감이 필요하다. 내가 '나' 임을 알 수 있는 것은 결국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가 아닐까.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 중에 인권운동사랑방에 와 보신 경험이 있으신지? 식당 및 회의실이 있는 3층의 한 공간은 동시에 두 명이 지나갈 수조차 없다. 그만큼 서로를 객관화하기 위해 필요한 사이(공간)가 없다. 이럴 때 내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도망가거나 나의 에고를 작게 하는 것.

 "『자비의 침묵 수도원』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복도 폭을 75센티미터로 만들었지요. 신부님, 수사님들이 욕을 바가지로 하더군요. 두 사람도 못 지나가도록 복도를 만들면 어떡하느냐고 시간이 지난 다음에 그 양반들이 그 복도를 그렇게 좋아한답니다. 사제들 간에 형제애를 키우는 복도라구요. 두 사람이 서로 지나가겠다고 우기면 한 사람도 그 복도에선 못 지나갑니다. 한 사람이 옆으로 붙어서 주면 그 때 비로소 두 사람이 모두 지나갈 수 있지요. 그래서 그 복도의 이름이 '겸손의 복도'입니다." 

건축가 이일훈 선생님 인터뷰 중에서 『나눔, 나눔, 나눔』

 우리가 성직자나 수도자는 아니지만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겸손함을 갖는 것은 어찌 보면 공동체가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 같기도 하다. 인간이 불완전하다는 믿음 하에 동료에게 교만한 마음을 품지 않기,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일 없이 고집스럽게 내 일에 몰두하기, 살아가는(인권운동의) 목적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질문하기 등 관계의 거리감을 유지하기 위해 내가 취했던 방법들이다. 

 3층 생활에 살면서 스트레스만 있었다면 어찌 견딜 수 있겠는가! 가족 아닌 사람들과 한 공간을 쓰면서 느꼈던 자잘한 행복은 스트레스를 충분히 날려주었다.
사무공간, 공동작업실, 휴게실, 식당 등이 연결되는 곳에서 기분을 환기시킬 수 있는 길은 산책을 가거나 먹는 일이었다. 특히 먹는 행위는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은 물론, 시간을 구분 짓게 하고, 서로의 에너지를 나눌 수 있게 한다. 이 과정에서 소통의 즐거움은 나를 풍요롭게 하고 타인에 대한 관심을 증진시킨다.(물론 먹는 일 이외에 다른 자잘한 행복도 있지만 그런 얘기는 다음 기회에)

 이 자리를 빌어 고백하자면, 평상심을 잃었던 순간 동료들에 대한 내 감정의 증폭도 매우 컸다. 당시 <인권하루소식>을 같이 만들었던 동료들, 내가 당신들을 미워했던 것만큼이나 좋아했던 것을 알고 있는지? 또한 나의 예민함을 견디어주어서 고맙게 여기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지? 이제 4층으로 와서 좋으냐고? … 심심해 죽겠다. 아무래도 내가 변한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