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가의 편지

웃자고 사는 건데

희곡을 읽고 있어요. 매주 월요일 저녁이면, 가수도 됐다가 하녀도 됐다가 하인도 됐다가……. 여섯 번에 걸쳐서, 몰리에르의 『부르주아 귀족』을 읽는 <동네에서 희곡 읽기>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어요. 친구가 관심 있으면 신청하라며 보내준 포스터를 보고 마음이 동했지요. (참가비도 무료라고 ^^;;;) 희곡 읽기 프로그램에는 웃음극과 격정극이 있었는데 뒤도 안 보고 웃음극을 신청했습니다. 신청 이유를 적으라길래 이렇게 적었지요. “웃고 싶어서”

 

고대 그리스부터 희극은 비극과 함께 생겨났다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을 비극, 희극, 서사시, 서정시의 네 장르로 분류했다고 하고요. 그런데 희극은 대체로 비극에 비해 많이 무시됐다고 합니다. 진지하지 않다는 이유로. 저도 떠오르는 희곡을 꼽아보면 비극이 더 많은 것 같아요. 중세에도 마찬가지였는데 몰리에르는 희극에 몰두한 작가라고 합니다. 루이 14세 시대에 활동했던 그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모든 법칙을 넘어선 위대한 법칙은 관객을 즐겁게 하는 것이다.”

 

『부르주아 귀족』은 제목에서도 짐작되듯이, 귀족이 되고 싶은 부르주아 주르댕이 주인공인 희곡입니다. 주르댕은 희곡에서 내내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그려집니다. 철학 교수를 집으로 모셔 배우는 것이 ‘아, 에, 이, 오, 우’ 소리를 내는 법이고, 재단사에게 주문한 비싼 비단 옷에 꽃이 거꾸로 달렸는데 귀족들의 유행이라는 말에 그냥 그대로 둡니다.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서로 배역을 나눠 읽으면서 등장인물들의 모습을 떠올려보는 시간은 은근히 재밌습니다. 그런데 우스꽝스러움은 희극의 전부가 아닙니다. 비극과 희극은 다루는 소재나 주제에서 차이를 보이기보다는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비극은 대체로 문제의 해결 불가능성을 극적으로 드러낸다면, 희극은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든 풀어가는 재치를 극적으로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시대가 평온할 때는 비극이 더 인기가 많고 사회가 불안할 때에는 희극이 더 인기가 많았다는 얘기도 있더라고요. 비극보다 희극이 무시됐던 이유는 진지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더 어렵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불가능한 것에 도전하는 것이니까요.

몰리에르가 했다는 말을 보면서 운동을 떠올려보았습니다. 모든 원칙을 넘어서 위대한 원칙은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이다! 그렇겠죠? 마르코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우리가 웃을 수 없다면, 우리가 만드는 세상은 사각형일 것이고, 따라서 그것을 돌릴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웃을 수 있어야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하겠지요. 프리다 칼로는 “비극처럼 우스꽝스러운 것도 없다”며 “웃음을 터뜨리는 것, 자기를 내던지고 가벼워지는 것, 이것이 바로 힘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웃자고 사는 건데…… 우리는 어떻게 웃을 수 있을까요? “웃고 싶어서” 희곡 읽기에 도전했는데 어떻게 웃을 수 있는 건지 더 모르게 됐어요. 물론 이건 진지하다는 타박을 많이 듣는 제 성격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흐흐. 그저 작년 겨울 어느 찻집의 화장실에서 본 문구를 다시 새기게 됩니다. “웃을 일이 생겨서 웃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일단 웃으면서 웃을 일이 생기도록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웃음으로 가득 채워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일단 웃으십시오. 그러면 웃을 일이 생깁니다.” (나 보라고 붙여놓은 줄 알 뻔 ^^;;;)

일단 웃어보기로 하면서 실없는 편지는 이만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