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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인(in)걸] 스무살이 된 걸(girl)이 보내는 편지

작년 겨울(벌써 작년이라니 믿을 수가 없다),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를 모티브로 영상을 하나 찍으려 했었다. 나와 내 친구들을 통해 막 20대에 들어선 여자애들의 이야기를 해보겠다며 시작했던 영상은 결국 이런저런 사건사고 끝에 제목이 모든 걸 말해주는('못나서 그래') 자아성찰 다큐로 끝을 맺었다. 그래도 이 영상 찍는다고 친구들을 열심히 찾아다녔던 덕에 한 겨울을 나홀로 방콕하는 대신 친구들 그 해 살았던 얘기 들으며 보낼 수 있었다.

학교를 조용하게는 다녔지만 썩 성실하게 다니지는 않았다. 덕택에 학교친구로 핸드폰에 저장된 이름이 열을 넘지 않는다. 그나마 지금까지 만나는 학교 때 친구로는, 내 친구의 친구들로 곁다리 관계를 시작해 아직까지도 '친구가 되고 있는 중'인 대여섯 명의 여자친구들이 있다. 학교 졸업하고 부쩍 만나는 일이 줄어들면서, 이대로 멀어지는건가 멀찍이서 마음만 헛헛해하고 있던 차였다. 다큐를 찍는다는 명목으로 애들을 찾아다니면서, 이게 그리 벌어지고만 있던 거리를 좁히는 일이 되어주는 것 같아서 좋았다. 친구집에 하룻밤 모여 놀던 날엔, 한 이불 덮고 예전 고등학교 얘기, 대학교 구린 얘기, 이 얘기 저 얘기 오락가락하는 수다들을 찍으면서 빨리 이 카메라 걷어치우고 나도 같이 편하게 얘기하고 싶다 계속 생각했다.

12월의 끝자락, 홍대에서의 풍경

12월이 끝날 무렵, 홍대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살짝 비싼 스파게티도 먹고 거리에서 옷 구경도 하면서 놀기로 예전에 정한 날이었다. 내 딴엔 나름대로 고대했던 카메라 없이 맨 몸으로 애들이랑 노는 그 날이기도 했다. 좀 늦게 도착해서 만나게 된 친구들은 멀리서 보기에도 아가씨 티가 폴폴 나는 옷차림과 화장을 하고 있었다. 점심을 먹으러 유명하다는 맛집에 갔다. 슬슬 배가 불러오때 쯤, 애들이 디카를 꺼내들고 둘씩 셋씩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케이블 TV 프로 '남녀탐구생활'에서 본 게 떠올랐다. 음식을 앞에 두고 끈임 없이 사진을 찍는 내용의 '여자 편' 에피소드였다. 찰칵찰칵. 다 먹고 나선 역시 유명하다는 어딘가에 가서 달달한 케잌을 먹었다. 케잌도 역시 디카로 찍었다. 어쩌다보니 소개팅 얘기를 하고 있었고,옆 테이블에선 인터넷 쇼핑에서 질렀다는 부츠 얘기가 들렸다. 어느 순간 또 화장품이 보였다. 맛없는 케익을 남기고, 이번엔 바로 아래층에 있던 스티커 사진점으로 갔다. 찍는 둥 마는 둥 옆에 서있다가 애들이 사진 꾸미기를 하는 사이 가게 밖으로 잠시 나왔다. 영상을 찍는 동안 조금쯤 좁혔다고 생각했던 친구들과의 거리는 카메라 없이 애들과 홍대에서 지냈던 하루가 끝나자 무한대로 벌어져있었다.

'학생' 정체성에서의 졸업, '아가씨' 라는 정체성으로의 입학

그 날 홍대에서 내가 친구들에게 느낀 거리감은 적어도 우리가 각자 대학에 가거나 재수를 하고, 홈플러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시청에서 일하게 되는 등, 서로 다른 곳에서 다른 일을 하고 살게 되며 벌어진 '차이'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놀란 건, 그렇게 달라지고만 있는 줄 알았던 친구들이 또 다른 방식으로 너무나 비슷해지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스무 살을 맞고 이십대 여성이 된다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지만, 친구들이 남녀탐구생활의 '여자'와도 겹쳐질 정도의 20대 여성이 되어가는 걸 보면서, 이토록 끈질기게 따라오는 '단일함의 굴레'가 참 무섭구나 싶었다. 수백 명을 '학생'이라는 단일한 존재로 만들려는 괴물 손아귀에 붙잡혀서 십 몇 년을 살았다. 같은 공간, 같은 복장, 같은 시간표, 같은 질서 같은 단일한 조건들을 서로 공유하며 살다보니 수백 명의 다른 존재가 어느 샌가 단일한 존재, '학생'이 되어 있었다. 스무 살이 되었고, 이제 우리는 서로 다른 공간 다른 옷 다른 시간표를 가지고 산다. 하지만 서로 다른 존재들을 특정 이익에 맞는 단일한 틀 안으로 우겨넣는 '같은 질서'는 활동공간을 학교에서 이 사회 전체로 확장한 채 여전히 반복된다. 학생은 학교가 무수한 청소년들에게 강요했던 단일한 정체성이었다. 그리고 그건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적어도 학교 공간 내에서 약화시킬 정도로는 절대적이었다. 여학생들이 더 이상 '학생'이 아니게 된 순간, 졸업과 동시에 또 다른 입학이 시작됐다. 이젠 '20대 여성' 혹은 '아가씨'로서의 정체성이 우리 몸에 올가미를 씌우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의 욕구는 왜 자꾸 아이러니한 결말을 맺는지

성인이 되면서 두 가지를 기억하고 가기로 했다. 19세 미만에겐 허용되지 않는 법적인 권리, 성인으로서의 사회적 권위, 뭐 그런 기득권을 좋든 싫든 갖게 되었다는 경계해야 할 사실이 하나. 또 하나는 술 취한 대학가 위로 겹쳐지는 소비자본주의 울라불라 하는 지배 질서의 음흉한 환영에 덧댄 '새로운 소비자 하나 추가요' 누군가 외치고 있는 것 같은 기분 나쁜 환청이 둘. 그 날 친구들이랑 홍대 거리를 누비고 다니며 했던 건, 함께 어울려 논다는 의미보다는 그저 소비였다. 정확히는 '홍대'라는 환상에 대한 소비였다. 그 환상을 가진 소비자들은 또 다시 홍대의 것을 비롯한 숱한 환상을 조장하는 사람들 손에 소모되고 있는 지도 몰랐다. 예쁜 여자에 대한 환상에 소모되고, 소녀시대의 환상에 소모되고, 남녀평등시대라는 환상에 소모되고. 우리가 하는 소비가 우리에 대한 소모로 돌고 돌았다. 나라고 화장을 아예 안 하는 것도 아니고, (표현이 좀 웃기지만) 어른티 나는 옷을 입어보고 싶은 욕구도 있다. 하지만 내 친구들을 비롯한 여성들이 '예쁘고 늘씬해지는 것'으로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여자라면 응당 그래야한다는 식으로 세간에 상식처럼 퍼져있는 무언의 강요들을 볼 때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누리고 유지하려는 남성 중심적인 사회의 교묘함이 더 깊숙이 다가올 때마다, 내 욕구도 단순히 내 것이라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틀 속에서 내 욕구가 정말 온전한 나의 욕구일까. 남성 중심의 사회와 그 틀에서 생겨난 욕구의 실현이 그저 내 욕구의 충족만으로 끝날 리는 없지 않느냐는 생각. 화장을 하는 것도, 사회에서 인정받는 인간이 되기 위한 투자들도, 내 욕구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하는데도 왜 자꾸만 '놈'들의 욕망을 채워주는 것으로 아이러니한 결말을 맺는지. 약자들은 왜 욕구조차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닌 건지.

사회가 요구하는 정체성이 인해 '나'를 지우기 전에

20대 여성이란 정체성은 내가 이십대 성인이고 여성이라는 단순한 사실의 조합이 아니다. 남성들에게 섹스어필할 수 있는 성인여성, 혹은 가부장의 입맛에 맞는 참한 아가씨, 이 사회가 만들어낸 '20대 여성' 이란 정체성. 이것의 정체라는 게 별 게 있겠나. 그리고 우리는 20대 여성이 되자마자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 마주치는 성희롱을 눈 감고, 대학가 남자동기들의 지극히 마초스런 발언들에 무뎌지고…살아남기 위해서였는지, 어째서였는지, 깊게 체념하고 수긍한 뒤에 속 뿌리부터 진득하게 썩어문드러지는 그런 과정을 밟고 있는 것만 같았다. 조금씩 조금씩 더 '아가씨'가 되어가는 친구들을 보면서, 그 애들을 만날 때마다 자꾸 더해가는 서글픔 때문에 이 글을 쓰게 됐다.

이십대가 된다는 게 점점 더 생각이 없어지고 얕아지는 그런 일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십대 여성이 된다는 게, 내게 향하는 폭력보다 그런 폭력이 아무렇지도 벌어지는 세상을 욕하는 것보다 시시때때로 거울보고 화장을 고치는 게 더 익숙하고 자연스러워지는 그런 일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다가는 결국 사회가 요구하는 '20대 여성'만 남고 '나'는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홍대에서 같이 놀던 날에도 사실은 그게 가장 두려웠던 것 같다.

그래서 내 욕구도 의심하고, 20대 여성(혹은 아가씨)으로 사회가 호명하는 내 정체성도 띠껍게 봤으면 좋겠다고, 난 이 놈의 사회를 도저히 못 믿겠으니 우리 같이 믿지 말자고, 그런 얘기들을 털어놓고 싶었는데…잘 됐는지 모르겠다. [페미니즘 인 걸]의 꼭지에 대놓고 20대가 어쩌고 하고 있는 게 잘 하는 짓인지도 다 쓰고 나니 문득 불안해진다. 그래도 마음만은 언제까지나 걸(girl)인 필자이니 이번만 너그럽게 봐주셨음 좋겠다. 아님, 페미니즘 인 걸 번외 정도로 치부해도 좋고.


덧붙임

엠건 님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여성주의팀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