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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책 공룡트림] 변화를 만드는 아이들

참여하고 실수하고, 경험하고 책임지며..

국내 최고라하는 박물관을 방문한 학생들은 도시락을 먹을 곳을 찾다가 결국 계단에 앉아 밥을 먹어야 했다. 하지만 비바람이 불자 드높은 천장은 무용지물이 되고, 계단에 쪼그려 앉아 먹는 밥이 천년의 찬란한 유물보다 기억에 남을 뻔한 체험학습의 경험. 몇 년전 국립중앙박물관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제는 실내에 마련된 의자와 탁자에서 도시락을 먹을 수 있으니, 보기 쉽지 않을 장면이다. 이런 변화를 이끌어낸 사람들은 다름아닌 어린이들이었다.

박물관을 바꾼 어린이들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국립중앙박물관이지만, 푸드코드를 이용하지 않고 도시락을 싸온 어린이들이 식사할 곳은 실내에 없었다. 도시락 식사를 위한 공간이 따로 마련돼 있지 않기 때문에 유물보호를 위해 실내 식사는 불가하다는 것이 박물관의 입장이었다. 햇빛을 가려주기는 하지만 바람막이는 될 수 없는 높은 천장 밑 계단에서 도시락을 먹어야 했다. 쌀쌀한 바람이 부는 날에도, 먼지가 일어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날에도 말이다.

이런 문제를 담은 초등 학생들의 편지와 조사활동, 언론보도가 결국 박물관의 변화를 불러왔고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먹을 수 있는 실내공간이 개방됐다.


수백 수천의 사람이 박물관을 방문했을텐데 어린들이 나서게 된 것이 궁금해지겠지만 따져보면 '당연했던' 그들의 사정이 드러난다. 박물관을 찾는 가족단위나 어른 관람객들은 비가 오거나 먼지가 일면 도시락을 싸왔더라도 푸드코드를 이용하거나 돌아가면 그만이다. 계단에서 밥을 먹어야할 처지를 스스로 벗어나면 된다. 하지만 어린이들은 도시락 때문이든 비용때문이든 단체방문의 여건때문이든 어쨌든 짜증나는 이 상황을 벗어나기 어려운 처지이다. 누구보다 문제를 가장 절실히, 정확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그들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아이들이 만드는 변화를 담은 이야기책이 있다. [놀이터를 만들어 주세요](쿠루사 글/ 모니카 도페르트 그림/ 최성희 옮김/ 동쪽나라)는 자유롭게 뛰어 놀 수 있는 공간을 원하는 달동네 아이들이 마침내 놀이터를 만들어낸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놀이터를 만들어 주세요.

한국처럼 베네수엘라에서도 농촌과 소도시에 살던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면서 높은 언덕배기까지 집과 건물을 들어서고 도로가 산을 넘나들게 됐다. 퓨마가 발자국을 남기던 산곡대기는 가장 가난한 달동네가 되고, 산과 계곡, 공터를 찾아 놀던 아이들도 더이상 뛰어 놀 곳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차와 사람들이 어지럽게 뒤얽힌 위험한 골목에서 공을 차고 노는 산호세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매일 꾸지람을 듣는 처지가 되어 버린다. 아이들은 마음놓고 뛰어 놀 만한 놀이터를 궁리하게 된다.

아이들은 공터에 놀이터를 만들어 달라고 시장을 찾아가 만나지만 별다른 성과없이 돌아 온다. 아이들의 주장이 신문에 보도가 되자 시장은 놀이터를 방문하지만 선거를 앞둔 보여주기 행차일뿐 결국 놀이터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다시 용기를 낸 아이들이 놀이터를 스스로 만들기로 결심하고, 이번에는 마을 어른들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바쁜 어른들은 선뜻 나서려 하지 않았지만 설득끝에 한 명 나서면서 하나둘 마을 어른들은 놀이터를 만들기 위해 도울 일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멋진 놀이터가 마을에 만들어 진다. '산호세 놀이터 - 누구나 와서 함께 놀아요'

산호세의 아이들이나 박물관을 바꾼 어린이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목소리를 내고 방법을 찾고 움직였다. 놀이터를 만들고 박물관을 바꾸기 위해, 바로 어른들의 세계를 움직이기 위해 직접 나선 것이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말하고 움직이고 행동하는 것을 좀처럼 용납하지 않는 어른들의 사회에서 이런 경우는 사건임에 틀림없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대견한 일'처럼 얘기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린이와 청소년의 참여가 당연한 사회와 문화라면 애초에 이런 결정적이고도 사소한(!) 문제는 발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언젠가 인권교육시간에 모둠별로 인권적인 구청을 설계해보는 시간을 가졌는데, 모둠 구성원에 청소년이 포함돼 있고 없고 차이에 따라 구청의 설계가 완전히 달라지는 양상을 보였다. 상상속 설계에서조차 청소년의 존재 유무에 따라 공간의 구성이 달라진 것이다. 이런 현상은 공간을 구성하는 것에만 해달되는 게 아닐 것이다. 법을 만드는 것도, 시험을 보는 것도, 축제를 여는 것도 그들의 목소리를 담으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아이들의 이런 참여를 빼앗는 흔한 이유가 '책임질 줄 모른다', '아직은 미숙하다'이다. 마치 지금 어른들은 처음부터 책임을 지고 성숙했던 것처럼 말이다. 참여하고 실수하고, 경험하면서 책임지는 방법도 알아가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경험했던대로. 유보시키는 그 이유들이 오히려 책임지고 성숙할 기회를 빼앗고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변화가 두려운 사회에 따끔한 한 방!

몇년전 교육감을 뽑는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때, 주목을 끄는 한 장의 후보 포스터가 등장했었다. 이 포스터의 주인공은 '청소년'이었다. 정식 교육감 후보는 아니었지만, 포스터에 써있는 공약이며 교육관이 구구절절 촌철살인인터라 많은 관심을 불러 모았다. '시험만 골백번, 현장경험 풍부' '입시경쟁 교육 NO, 다양하고 평등한 교육 YES' '뽑 못으니까 나와 봤다' '청소년이 빠진 교육감 선거, 한 달도 못 가 2MB된다' 등등. 교육감 선거를 하면서 청소년을 쏙 빼놓는 어이없는 사회에 보내는 도전장과도 같은 포스터였다. 이후에도 청소년과 관련된 사안에 청소년들의 목소리와 행동이 이어지고 있지만, 사회의 반응은 '대단하다'와 '나댄다'를 넘어서지 못한 듯하다. 당연하게 참여하는 일상은 아직 구조화되지 못하고 있다.

청소년의 정치, 사회참여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나라는 20세기도 아니고, 물론 21세기는 더더욱 아니고, 연령으로만 따지면 조선시대도 지금보다 앞설 것이다. 변화가 두려운 사회가 대처하는 방식은 말문을 막고 기회를 주지 않는 것. 우리의 학교에서, 집 그리고 사회곳곳에서 어린이와 청소년의 주장은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지 질문을 던져보자.
덧붙임

고은채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