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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즐거운 물구나무] "여기 주민등록번호 쓰세요!"

지금은 자동화 기기로만 운영되는 국민은행 서여의도 지점. 그곳을 지날 때마다 나는 주민등록번호에 대한 '안 좋은 추억'이 생각난다.

올 봄이었을까? 나는 급하게 송금할 일이 있어서, 내 통장과 수표 몇 장을 그 은행의 한 창구 직원에게 건넸다. 수표를 통장에 입금한 후, 현금카드로 타 계좌 이체를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나는 창구 직원으로부터 뜻밖의 불필요한 요구를 받았다. 수표 뒷면에 주민등록번호를 포함해 개인정보의 이서(뒷보증)를 하라는 것.

순간 여러 가지 단상이 주르륵 스치고 지나갔다. 언젠가 방송에서 앞으로는 수표에 주민등록번호를 적을 필요가 없다는 소식을 분명 들었는데, 그 이후 다른 은행에서는 자기 통장에 수표를 입금할 때 이서를 요구하지 않았는데, 은행기계를 사용하게 되면 주민등록번호 없이도 수표 입금이 가능한데, 만약 수표에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실명으로 개설된 통장으로 수표 추적이 가능할 텐데…….

그래서 나는 창구 직원에게 위에서 스친 단상들을 이야기하면서 "이곳에서는 왜 불필요한 이서를 요구하느냐?"고 따져 물었다. 그러자, 창구 직원 또한 뜻밖의 질문을 받았다는 듯 생뚱맞은 표정을 짓더니, "우리 지점에서는 원래 그렇게 하게 되어 있다"는 상투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순간 나는 은행지점장까지 불러가며 관련 규정을 내놓으라는 둥 이래저래 굴뚝같이 문제제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송금이 워낙 급했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주민등록번호를 이서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나는 혜화동에 있는 다른 국민은행에서 수표를 입금할 일이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수표에 이서를 하지 않고 통장과 함께 은행 직원에게 입금을 부탁했는데, 이때는 주민등록번호의 요구없이 입금처리가 완료됐다. 결국 수표에 주민등록번호를 요구하는 이서 행위는 불필요하다는 사실이 국민은행 스스로에 의해 입증된 셈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고 싶다. 즉 필요 이상의 개인정보를 요구하는 것은 단지 불편하고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위법한 것이며 명백한 인권침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권의 문제가 관행과 편의라는 이름으로 가려지고 있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 사회가 "여기 주민등록번호 쓰세요"라는 말을 매우 어색해하는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서, 우리 모두는 개인정보에 더욱 민감해져야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사소한' 문제 또한 '공식적으로' 바로잡을 수 있는 개인정보 보호기구가 시급히 도입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