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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온의 인권이야기] 혼자 살 것인가, 함께 살 것인가

빈 마을 살이(3)

당신에게 집이란

얼마 전 한 친구와 같이 빈집에 대한 인터뷰에 응한 적이 있었다. 두 세 시간동안 긴 수다를 떨면서 빈집 생활을 되짚어볼 수 있는 좋은 인터뷰였다. 그 와중에 귓가에 계속 맴도는 물음이 하나 있었다. “빈집 사람들에게, 집이란 무엇입니까?”

그의 물음도 재밌었지만, 그의 물음 속에서 내려진 집에 대한 정의가 인상적이었다. 함께 인터뷰를 했던 한 친구가 “집은 쓰레기 버리는 곳”이라고 말했다. 자기의 온갖 분비물, 배설물을 버리기도 하고 자신만의 잡동사니들과 함께 편안하게 뒹구는 공간이며 그래서 남에게 잘 드러내지도 않게 되는 곳이 집이다. 그런데 빈집 사람들은 사적 공간을 낯선 사람들과 공유하고 집단으로 살아가려 한다. 왜 그런가? 빈집 사람들에게 집은 무엇이기에? 질문을 받고 잠시 난감했다. 일단은 집이 그렇게 묘사되는 것에 좀 당황했다. 날마다 집안의 쓰레기를 밖으로 방출하고, 쓸고 닦고, 그 닦은 흔적까지 삶아 버리면서 살고 있는 나에게 집이 쓰레기를 버리는 곳이라고 하니 얼핏 이해되지 않았다. 사실 중요해보이지만 일단 차치하기로 하자. 집이란 곳이 다른 사회 공간에 비해 자기만의 스타일과 영역표시들이 표출되는 공간이란 점은 어쨌든 맞는 말이다. 그리고 터럭과 때와 타액이 뒤섞이는 곳이니 더 그렇다. 그때 옆에 있던 한 친구가 말을 받았다.

“‘집이란 무엇인가’라는 형태로 고민을 해본 적은 없어서……. 그런데 누군가와 같이 살게 되면, 하다못해 애인이랑 같이 살 결심을 하면 어차피 그때부터는 ‘사적인 공간’이란 없어지게 되잖아요.”

집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결국 혼자 살 것인가, 함께 살 것인가의 문제로 환원되었다. 함께 살기로 한다면, 그 후의 문제는 어쨌든 해결하고 살아야 할 과제가 남게 된다.

섞일 수 있는 물건과 섞일 수 없는 물건?

함께 살면 모든 것이 뒤섞인다. 조작과 이동이 편리한 개전제품으로 시작해서, 자신의 침/땀/눈물/콧물/오줌/똥/피 등 분비물이 많이 접촉되는 물건들까지 섞이기 시작한다. 물론 물건에 따라 섞이는 것과 섞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 차이가 있을 뿐 어떤 사람의 어떤 물건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면 그건 그런 맥락 속에서 그런 것이지 절대적인 원칙은 아니다. 생전 모르는 사람의 물건에 손을 대는 것이 처음에는 어색하겠지만, 각자의 물건들을 나란히 늘어놓고 살다보면 그 집이 자신에게 얼마나 친숙해졌는지, 함께 사는 사람과 얼마나 익숙하게 소통하는지에 따라 물건은 서서히 경계를 넘는다. 나 역시 어느 순간부터는 한 집에 사는, (애인이 아닌) 남자의 속옷에 손대는 일이 어렵지 않다. 다른 집들은 또 상황이 조금씩 다를 것이다. 단기투숙객의 비율이 높아도 상황은 조금 다를 것이다.

이렇게 물건들과 타액들이 뒤섞여 지내는 것이 싫을 수 있다. 바쁘게 살면 더 그럴 수 있다. 밖에서 이리 저리 치이고 스트레스 많이 받고 집에 왔는데, 가장 친숙해야 할 자신의 빨래가 누군가의 손에 의해 개져있거나 다른 곳에 이동해있다면 감사한 마음보다도 먼저 불쾌함이 솟을 수 있다. 좋은 물건을 갖고 있다면 또 싫을 수 있다. 이 집에 산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개인만의 물건’은 반쯤 포기해야 하는데, 남이 손대면 망가지기 쉬운 물건을 갖고 있다면, 언제나 불안할 수도 있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면 스트레스는 스스로 감당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저렇게 걱정을 사는 물건은 사람들이 만지지 않는다. 귀중품처럼 보일수록 누구도 손을 대기 꺼려하기 때문에 오히려 치워야할 때 치우지 못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함께 살면서 물건이 어차피 섞이게 되는 빈집의 경우, 소유권 침해 때문에 싸움이 벌어지기 보다는 어떤 물건이 공간을 지나치게 차지하고 있거나, 다른 사람들이 손댈 수 없는 물건이 애매한 위치에 있을 때이다. 그러니 애초에 “이 물건을 여기로 옮긴 사연, 누구 아는 사람?”이라고 하면 한결 부드럽게 일이 진행된다. “이 노트북은 써도 돼요.”라고 해도 별 문제는 생기지 않는다. 물론 아직 공유할 준비가 안 되었다면 “내 물건, 난 여기에 있는 게 아직은 편한데. 괜찮으?” 하고 말해볼 수도 있다. 오히려 둘 사이에 뭔가 까칠한 감정이 있었다면 그 때는 모든 문제가 다 소유권의 문제로 쉽게 이동한다. 아이들 책상에 금 긋고 넘어오지 말라고 하는 것처럼 “내 물건 함부로 건드리지 마.”가 되는 것이다. 결론이 그렇게 나면 그 후로는 모든 일이 잘 꼬이게 되어있다.

따라서 물건에 묻은 타액은 생각보다 별 게 아닐 수 있다. 문제는 마음의 찌꺼기이다. 이것을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 물건은 소유되거나 공유/허용된다. 나에게 없는 것을 누군가로부터 자꾸 얻어 쓰다보면, 내 것도 자꾸 내어주게 된다. 오히려 누군가 갑자기 바득바득 소유를 주장하는 일이 생겼다면, 그건 서로 간의 긴장을 해소할 수 없음의 표현이라 봐야 한다. 내 물건 내가 잘 관리하는 것도 미덕이나, 누가 내 물건에 손을 대도 상관없고, 내가 누군가의 물건을 대신 치워줘도 괜찮은 것도 상당한 미덕임에 틀림없다.

빈집 살림살이 풍경

▲ 빈집 살림살이 풍경


분비물 처리법 - 고양이와 생리대, 각종 터럭

나아가 각자의 직접적인 분비물에 대해서는 어떤가. 터럭, 각질(때), 콧물, 눈곱, 똥, 오줌, 생리……. 같이 살면서 이것들의 처리가 가장 문제이다. 매번 방법은 마련된다. 물론 가장 쉽지 않은 문제이고, 아마도 가장 유동적으로 처리될 부분이다. 그래도 너무 무겁게 접근할 필요는 없다.

사실 고양이 3마리와 같이 사는 ‘아랫집’(첫 번째 빈집)의 경우, 고양이 털, 오줌, 똥, 스프레이한 것이 사람들을 적잖이 괴롭혀왔다. 누가 고양이똥을 청소하고 모래를 갈아주며 털 날리는 거실을 청소하고 스프레이 한 이불을 빨래하는가 하는 문제가 논의되는 것을 보면. 반려동물을 키우는 집이면 알겠지만, 이들과 함께 사는 한 분비물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는 것이며 그것도 내가 치워야 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이 고양이들이 어찌나 예쁜지, 사실 그런 수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받는 존재로 당당히 아랫집을 지키고 있다. 오히려 이 고양이 3마리는 다른 존재의 분비물에 대해 신경 쓰고 적응하고 함께 대처하는 법을 우리에게 일깨우는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고양이들도 그들 나름대로 인간들의 터럭과 냄새와 온갖 물건들에 스트레스 받으면서도 화장실이 더러우면 이불에 스프레이를 해서 사람을 훈련시키는 등 적극적으로 이 공간을 개선시켜가면서 사는 것일 수 있겠다.

내가 사는 ‘옆집’(세 번째 빈집)의 경우, 화장실에는 언제나 작은 세숫대야에 붉은 면 생리대가 떠다닌다. 생리하는 여성 3명이 살고, 생리하지 않는 남성 3명과 성별을 굳이 따지는 게 옳은지 어떤지 싶은 아기 하나가 살고 있는데, 언젠가부터 이 집의 화장실에는 세숫대야나 바가지에 여성들이 생리대들이 떠다니기 시작했다. 언젠가 한 남성이 “내가 머리감을 때 쓸 세숫대야가 다 생리대로 차 있다. 혹시 솥에 생리대를 담가둘 수는 없는가?”하여 이제는 가급적 세숫대야 하나는 남겨두려 노력하고 있지만. 다른 빈집에 가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 집에서 그렇게 한다면 누군가는 굉장히 불쾌감을 표시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예상했다. 어쨌든 ‘옆집’에서는 최초의 시도가 받아들여지고 난 후 몇 가지 조치가 있긴 했어도 다른 사람의 핏물에 대해서도 그다지 놀라지 않게 되었다. 내 생리대를 옆방에 사는 친구가, 친구의 남자친구이면서 나의 친구이기도 한 남성이 보는 것이 별로 이상하지 않다. 혹은 옆방의 여성인 내 친구의 생리대를 내 남자친구가 보는 것도 딱히 이상하지 않다. 또 다른 집의 사람들이 ‘옆집’에 와서, 그 광경을 보고 무슨 말을 한 적은 없다. 모든 집이 똑같은 질서와 수준을 규칙처럼 적용해서 살 필요는 없고, 타액이나 터럭에 대해서 반드시 어떻게 처리되어야 한다는 것도 없다.

그럼에도 모든 집에서 공통적으로 터럭관리에 대해 유난히 자주 거론되는 것을 보면 적어도 빈 마을에서 터럭이란 섞일 수는 있어도 가급적 본인이 잘 처리를 해야 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내 것인지 남의 것인지 모를 거웃을 방바닥에서 보고 살지만 화장실 수챗구멍에 있는 남의 머리카락은 왠지 거슬리는 것이, 다른 맥락이 숨어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빈집 살림살이 풍경.

▲ 빈집 살림살이 풍경.


함께 숨 쉬고 뒹구는 빈집

만약 이런 뒤죽박죽인 곳에서 ‘도저히 못 살겠다’ 싶으면 언제든 나가도 좋다. 아니면 자신의 방식을 주장할 수 있는 형식을 스스로 구성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체액이든 터럭이든, 집에 오래 있는 사람에게나 보이지, 대부분의 생활을 밖에서 하는 사람에게 저 정도의 뒤섞임은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다. 오히려 체액과 터럭에 민감해지는 경우는 고시원이나 기숙사 같은 경우가 아닐까 싶다. 잘 모르는 기도 하지만 잘 소통할 수 없는 사람과 집단생활을 해야 할 때, 고립된 단자로서 생활의 문제들과 직면해야 하는데 낯선 물건들, 타인의 흔적은 두려운 것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옆방 사람의 코푸는 소리는 소음이 되고 자기 방 한 칸은 금세 쓰레기장이 되기 쉽다. 어쩌다 발견할지도 모를 옆 사람의 물건, 심지어 지문도 스트레스가 될 것이다. 기숙사에서도 더러 그런 경험들을 하는 모양이다. 최대한 서로 관계를 맺지 않으려는 집단 숙식은 그런 의미에서 늘 피로할 것이다. 빈집이 그런 스트레스를 잘 조율하고 사는 것은 기본적으로 뒤섞임을 두려워하지 말고 적당히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여행객의 마인드가 생활 전반에 묻어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좁은 공간에서 더 자유롭게 살려면 오히려 관계를 터야 함을 알고, 뒤섞임 속에 발생하는 작은 갈등들을 적극적으로 타개하는 용기를 발휘하면서 집 안에서 여행가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집은 더 이상 자신의 분비물로 뒤덮이는 쓰레기장이 아니라 각자의 영역표시들마저 개성으로 봐줄 수 있는 문화적 공간이 될 수 있다. 그런 집은 함께 숨 쉬고 먹고 마시고 뒹구는 게 신나고 즐겁고 유쾌하다.
덧붙임

김디온 님은 빈마을 장기투숙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