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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욱의 인권이야기] 무지한 민족주의, 비열한 민족주의

<로동신문>과 한국언론에 ‘민족주의와 인권’을 말하다

얼마 전에 하인스 워드 모자가 대대적인 환영과 관심 속에서 한국을 다녀갔다. 그의 방문은 우리 사회의 ‘혼혈인’들이 겪는 냉대와 차별을 돌아보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마침 작년에 결혼한 우리나라 농촌 총각의 35% 이상이 동남아 여성을 신부로 맞이하는 등 우리사회의 변화와 맞물려, 많은 이들이 순혈주의적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다민족 다인종 사회의 개방성이 필요함을 얘기하였다. 그런데 북한의 <로동신문>에서는 이에 대하여 뜻밖에도 “민족의 단일성을 부정하고 남조선을 이민족화, 잡탕화, 미국화하려는 용납 못할 민족말살론”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단일민족에 대한 북의 강박

<로동신문>은 세계화의 시대란 “지배주의와 식민주의가 약소민족들의 운명을 위협하는 현실”이며, 다인종 다민족 사회란 곧 “우리 단일민족의 고유성과 우수성을 부정하고 민족의 정신무장해제를 설교하는 반역행위”라고 한다. 그리하여 남한의 각계각층 사람들에게 “우리 민족의 혈통마저 흐리게 하고 민족자체를 말살하려는 사대매국세력의 반민족적 책동을 단호히 배격”하고 “우리 민족제일주의와 《우리 민족끼리》의 기치를 더욱 높이 들고 민족을 지키고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애국투쟁에 적극 나설” 것을 주문하고 있다.

참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워드 모자의 감동적인 인생역정을 통해 우리 사회의 ‘혼혈인’의 인권문제를 돌이켜보려는 것에 대하여 북한이 그렇게 딴죽을 걸 일은 아니었다. 물론 북한으로서도 일부러 악담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닐 테지만, 그 인식의 차이가 이렇게 크니 걱정이다.

북한이 원래 우리식 사회주의와 우리민족제일주의를 말하고, 온 사회가 김일성의 가계를 중심으로 하나의 대가정을 이루고 있음을 자랑하고 있음은 알고 있었지만, 단일민족의 순수성에 이렇게 강박증을 보일 줄은 미처 몰랐다. 이 정도의 집착이라면 북한의 민족주의는 미국의 패권주의로부터 북한 인민들의 인권을 보호한다는 방어적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인간은 개개인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구성원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민족의 구성원이어야만 인권이 있다는 논리는 곧, 인간을 어떤 범주에 넣거나 혹은 인간에 어떤 상표를 붙여 서로 차별하고 타자화하는 논리 혹은 ‘적과 동지의 이분법’의 논리로 확대될 수 있다. 그러한 타자화와 이분법의 논리에서는, 예컨대 중국에 건너갔다가 임신하게 된 아이를 강제로 낙태시키거나, 또는 다른 민족의 구성원들을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수단화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데, 결국 미국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북한의 인권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것 또한 비난할 수 없게 된다.


비열하기까지 한 우리의 민족주의


그런데 워드를 한민족의 일원으로 반기는 우리의 민족주의는 과연 보편적 인권의식에 얼마나 값할는지? 기업체들이 경쟁적으로 고가의 자동차와 의복 및 귀빈 숙소를 제공하고, 대통령도 그들을 초대하여 식사를 함께 하고, 매스컴은 온통 워드 모자의 이야기를 했으나, 정작 기뻐해야 할 우리 사회의 ‘혼혈’ 청소년들의 반응은 그렇지 않았다. 한국청소년상담원의 조사에 따르면 ‘혼혈’ 청소년 셋 중 둘이 워드의 성공얘기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왜 그럴까? 이에 관하여 프랑스에서 우리나라로 귀화한 이다도시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뼈아프다. “다니엘 헤니와 하인스 워드는 우리말도 사용하지 않고 한국 국적이 아님에도 사람들로부터 열렬한 환호와 성원을 받지만 한 나라에서 같이 살고 있는 이웃인 국내 ‘혼혈인’들에 대해서는 어떤 따뜻한 사회적 시선을 느낄 수 없다.”

워드 모자에 대한 환대와 찬사는 그가 한국계 ‘미국인’, 그것도 미국 풋볼의 영웅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그 관심과 애정은 인권적 감수성의 발로가 아니라 아메리칸 드림의 성공스토리에 대한 선망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별 볼 일이 없는 한국계 외국인, 아니 ‘혼혈’의 한국인들은 거들떠도 안 보면서, 잘 나가는 한국계 미국인에 대하여는 원더풀을 연발하는 민족주의는 과연 어떤 민족주의인가? 워드의 어머니는 워드가 어린 시절 한국 아이들로부터 따돌림 당할 때 가장 가슴이 아팠고, 그리하여 심지어 한국 아이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하였다고 하는데, 강자에 아첨하고 약자를 능멸하는 우리의 반인권주의는 그 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북한의 민족주의를 무지하다고 비웃는다면, 우리의 민족주의는 비열하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민족주의로는 인권을 위해 어떤 소득을 기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남북의 화해와 통일에도 해로울 뿐이다. 인권과 남북협력을 위해서라도 한반도의 민족주의는 좀 더 수준이 높아져야겠다.
덧붙임

정태욱 님은 아주대학교 법학 교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