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가의 편지

봄날의 정원을 꿈꾸며

얼마만이라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남산 둘레길을 걸었습니다. 만개한 벚꽃, 아직 봉우리를 간직하고 있는 벚꽃, 잎을 날리며 산화해가는 벚꽃을 보며 나의 삶은 어디쯤에 있을지를 가늠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이제 막 잎을 떨구려는 시절을 통과하고 있는 벚꽃은 아닐까요?

 

저는 내년이면 50대를 맞이합니다. 작년에 보낸 안식년은 중년의 가운데에서 제 삶을 정리하고 앞으로 삶을 고민해야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삼십에서 사십으로 넘어가는 것도 많은 변화가 있겠지만 사십에서 오십으로 넘어가는 시간 역시 인간의 삶에서 다양한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 같습니다. 그 변화가 저에게는 신체적인 변화로 왔고, 그 변화를 수용하면서 새로운 인생 2막을 시작하려 합니다. 눈치 채셨나요? 이제 저는 인권운동사랑방을 그만 두려고 합니다.

 

저에게 있어서 인권운동사랑방은 인생학교이기도 했고, 연인이자 친구이기도 했습니다. 인권이라는 같은 이상을 공유하고 배우며 일용할 양식을 나누는 공동체이기도 했습니다. 1994년 8월 1일 인권운동사랑방에 입방할 당시 오랜 시절을 이곳에서 보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하루하루 보낸 시간들이 어느덧 20여년을 훌쩍 넘어섰네요. 영화 필름을 돌리듯 그 시간들을 만나보니 좋고 행복하고 보람된 시절들, 힘들고 지지고 슬펐던 시절들도 같이 떠오릅니다. 한동안 제 꿈속에서 인권운동사랑방을 거쳐 간 활동가들이 나타나 놀라기도 했습니다.

 

인권운동사랑방을 그만 두는 것은 아주 오래된 연인과 헤어지는 것과 같은 일로 다가오네요. 어떤 인연도 영원하지 않고 이별을 맞이해야 할 순간이 올 텐데, 저는 어리석게도 영원한 사랑을 꿈꾼 것 같아요. 우리 모두는 언젠가 모든 관계로부터 이별을 해야 할 시간을 맞이합니다. 이별을 준비하면서 저는 인권운동사랑방 안에서 저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나와 내 주변을 정리를 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힘들지만 좋은 이별도 존재할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제가 인권운동사랑방을 그만 두려고 고민하던 즘, 아무래도 제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차분하게 정리하면서 어떻게 살고 싶은 지에 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삶을 회고하며 과연 자신이 가치 있는 삶을 살았는지 생각도 해봅니다. 이 때문에 새로운 혼란이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사춘기 이후 오춘기 라는 말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찾고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시간이 앞으로 펼쳐질 것 같습니다.

 

남산 둘레길 안에는 봄날임에도 다양한 꽃들이 존재합니다. 같은 나무이지만 꽃이 피고 지는 시기가 제 각각입니다. 앞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봉오리를 맺고 있는 꽃들, 만개한 꽃들, 지는 꽃들……. 그 모든 꽃들이 남산 둘레길이라는 이름 속에서 공존합니다. 저는 이제 새로운 꽃을 피우려고 준비하는, 다시 뿌리의 힘을 튼튼히 세우려고 땅 속의 물을 빨아들이는, 하늘을 향해 두 팔 벌리고 웃고 있는 나무입니다.

 

고맙습니다. 행복하시고 건강한 봄날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