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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재난 이후의 시간을 살아가는 법

생명안전기본법 제정운동이 만들어갈 변화

얼마 전 10.29 이태원참사 1주기 추모문화제에 참여한 시민들과 유가족들은 한목소리로 외쳤다. “국회에 계류 중인 이태원참사 특별법을 제정하라”,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라.” 오래전부터 여러 번 외쳐왔던 구호, 익숙해져 귀에 익을 만큼 반복되는 호소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토록 오랫동안 외쳐왔음에도 미처 이뤄지지 못한 요구이기도 하다.

그동안 재난, 산재가 발생할 때마다 우리는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안전사회 건설’을 외쳐왔다. 수많은 사건들 속에서 아프게 배워왔음에도 여전히 참사가 반복되는 사회를 살아간다. 변화가 너무 더디게만 보여 마치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 같은 무력감까지 들곤 한다. 안전한 사회를 요구해온 지난 시간 동안 변한 것과 여전히 변해야 할 것을 살펴야 하는 이유이다.

 

변한 것과 변해야 할 것

세월호참사 이후 안전사회 건설에 대한 요구가 높았다. 한국사회에서 반복되어온 재난, 산재를 겪으며 개별 사건에 대응하는 일을 넘어 안전한 사회에 대한 지향을 확인해야 한다는 인식이 넓어졌다. 안전권을 기본권으로 규정하고 국가의 책무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문제의식도 커졌다. 이러한 요구가 모여 지난 9월 28일, 안전권 명시, 조사기구 설치, 피해자 권리 보장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생명안전기본법 제정을 위한 국민동의청원이 5만 명의 청원인을 모으며 성사되었다. 2020년 안전기본법, 생명안전기본법이 발의된 데 이어 최근 성사된 국민동의청원까지, 현재 국회에는 3개의 법안이 계류되어 있다.

법이 만들어진다고 해서 원래 없던 권리가 생겨나지도 않고, 법이 없다고 해서 있는 권리가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생명과 안전의 권리, 재난 피해자의 권리는 이미 끊임없이 확장되어 왔다. 호소하는 피해자에서 권리의 주체로 나아간 재난 피해자들의 투쟁으로 산업안전보건법이 개정되고 중대재해처벌법이 제정되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다. 재난이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는 인식,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킬 국가의 책무에 대한 요구도 점점 넓어져 왔다. 이는 재난을 먼저 겪었던 피해자들의 투쟁, 이와 함께 해온 사회운동이 만들어온 것이다.

동시에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세월호참사가 발생했을 때 518 유가족은 세월호 유가족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 원통함을 내가 아오, 힘내소, 쓰러지지 마시오.” 그리고 1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러, 세월호 유가족이 같은 말을 다시 이태원 유가족에게 건넸다. 정부와 책임 당국은 여전히 재난을 개인화하며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책임을 돌리고, 구조적 원인을 밝히며 재발방지책을 세우는 대신 미봉책을 내놓기에 급급하다. 여전히 재난 피해자들에 대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배려한다’는 식의 시혜적 태도를 고수하기도 한다. 재난 피해자가 사회의 불의를 먼저 발견하고, 끝까지 질문하며, 세상을 바꿔나가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애써 외면한다. 재난과 권리에 대한 인식이 넓어져 왔음에도 피해자가 겪어야만 하는 시간이 달라지지 않았다면, 문제는 재난을 겪으며 달라지고 만들어온 변화를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는 국가와 정책에 있다. 생명안전기본법 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모인 배경이다.

 

생명과 안전이 권리라면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가 일어난 다음해,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재난안전기본법)이 제정된다. 그러나 현행 재난안전기본법은 재난을 ‘국민의 생명·신체·재산과 국가에 피해를 주거나 줄 수 있는 것’으로 규정하며, 주로 물리적 피해에 대한 정부의 대처 방안만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전제와 방향은 물적 피해의 복구와 정부 기능의 유지에 중점을 두게 하며, 정부 중심의 효율성에 대한 강조로 이어진다. ‘안전’이 ‘권리’가 아니라 ‘관리’와 등치되며, 공권력 강화를 통한 통제가 해법으로 제시되는 식이다. 그렇기에 재난 대응 과정에서 물리적 피해를 중심으로 재난을 사고하고, 권한과 통제 중심으로 안전을 규정하며, 시혜적 관점으로 피해자에 접근하곤 한다. 재난에 따른 국가권력의 책임을 더 명확히 묻기보다는, 오히려 책임을 회피하거나 면책하는 방식으로 법이 작동해왔다.

관리와 통제 중심으로 안전을 바라보는 문제는 이태원참사에서도 나타났다. 권리는 자격을 묻지 않는다. 그러나 안전을 관리의 문제로 인식할 때, 피해자는 피해자의 자격을 증명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왜 거기에 놀러갔냐, 왜 위험해보일 때 빠져나오지 않았냐는 질문을 피해자에게 던지는 식이다. 이때 안전을 책임져야 할 국가의 의무는 지워지고, 국가는 관리자의 위치에서 피해자를 평가하게 된다.

반면 자격을 묻지 않는 권리로 안전을 생각할 때, 안전사고는 개개인의 탓이 아니라 국가의 책임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국가는 피해자를 탓하거나 피해자의 자격을 묻는 관리자의 입장이 아니라, 안전할 권리를 제대로 세우지 못한 점을 사과하고 책임져야 할 위치에 서야 한다. 국가권력이 생명과 안전을 권리로 인식하며 정책을 수립하고 재난에 신속하면서도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는 사회, 안전사고가 개개인의 탓이 아니라 국가의 책임으로 인식되는 사회, 재난의 구조적 원인을 밝히며 더욱 안전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과제를 찾아가는 사회, 생명안전기본법이 그리는 사회이다.

 

권리를 지키고 확장하는 재난조사

안전을 권리로 보장하며 확장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과정에서, 재난에 대해 조사하며 구조적 원인을 밝히는 일은 필수적이다. 재난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드러나지만, 특정한 요인으로 인해 일어난 하나의 사건으로 그 시작과 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재난이 사건으로 드러나기 전까지 재난은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세월호참사가 2014년 4월 16일 하루 동안 일어난 재난이 아니라 선박 규제 완화, 관리감독 불량, 해경 운영의 문제, 진실과 책임을 요구하는 유가족을 탄압한 정부의 문제, 피해자에 대한 혐오와 공격까지,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이 복합적이자 연속적으로 구성된 사건인 것처럼, 사건으로 드러나기 이전부터 사건으로 드러난 이후에도 재난은 진행된다. 다양한 위험요소가 특정한 사회적 조건을 만나면서 재난이 된다. 기존에 존재하던 사회·경제·문화적 조건이 위험요소와 결합하며 재난이 된다는 점에서, 재난은 사회적이다. 그렇기에 재난을 단일한 사건으로만 이해할 수 없으며, 재난을 조사할 때 구조적 원인을 밝히고 과제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재난은 여전히 특정한 순간에 일어난 단일사건처럼 인식되고, 개별 사건에 대해서 검찰·경찰의 수사나 특별법에 따라 조사하는 방식 외에 다른 경험을 가지지 못해왔다. 물론 재난에 대해서 법적 책임을 가진 사람을 찾아내고 처벌하는 일은 긴요하다. 하지만 재난에 대한 책임이 법적 책임에 그치지 않듯이, 재난에 대한 조사 역시 법적 수사에만 그칠 수는 없다. 법적 책임을 중심으로 사건을 조사할 때 사건의 구조적 원인을 드러내기는 어렵고, 말단 실행자 처벌에만 그치는 일이 반복된다. 세월호 이후 정부는 재난 상황에 대해 발 빠르게 대책을 제시해왔지만, 이는 오히려 재난의 흔적을 지우는 방식으로 진행되곤 했다. 정부의 재난 대응체계에 어떤 점이 문제적이었는지를 진지하게 검토하기 위한 재난사고조사 과정을 건너뛰며, 재난을 둘러싼 사회적 토론을 봉쇄하고, 재난 이후를 살아가는 재난 피해자들과 사회가 함께 만들어갔어야 할 공동체적 회복의 과정은 삭제되는 식이었다. 제대로 된 원인규명과 대책 마련이라는 단계를 건너뛴 채 내놓는 미봉책으로는 재난 이후 언제나 요구되어온 안전한 사회라는 목표는 요원해진다.

그래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재난조사의 경험을 만들고 쌓아가야 한다. 재난조사는 재난이라는 사건에 대한 조사인 동시에, 기존 사회의 문제점을 찾고 개선함으로써 더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과정이기도 하다. 위험요소를 모두 제거하는 일은 불가능한 목표일 수 있지만, 위험을 맞닥뜨렸을 때 더욱 잘 대처하는 사회를 목표로 삼을 수는 있다. 재난을 겪은 국가와 사회에서 어떤 점이 미흡했는지, 어떤 노력을 기울일 수 있을지 방법을 찾는 과정으로서 재난조사를 이해할 때, 생명안전기본법이 규정하는 ‘상설적·독립적 재난조사 기구’의 역할도 더욱 명확해진다. 재난은 무엇이고 재난조사는 어떤 것인지, 사건이 발생한 뒤 그 사건을 조사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상시적으로 고민하고 탐구하고 과제를 찾아갈 때 재난조사의 패러다임 역시 변할 수 있을 것이다.

 

재난 이후를 살아가는 법

재난이 사회적인 사건인 만큼, 사회는 재난을 함께 겪는다. 자연스럽게 재난 이후의 사회를 그리고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안전사회 건설이라는 구호가 주요하게 등장해왔다. 재난, 산재 피해자와 유가족들은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고 외쳐왔고, 그만큼 사회는 변해왔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등장한 생명안전기본법 제정운동이 재난을 함께 잘 겪어낼 수 있는 사회를 만들 과제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생명안전기본법을 통해서 개별 참사를 넘어 피해자들에게 '국가 책임 인정'이라는 원칙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로 만들자. 끝끝내 생명과 안전에 대한 책임을 모른 체하는 국가가 더는 외면할 수 없도록, 재난 피해자의 외침이 사회를 조금씩 안전하게 만들어 왔듯이 안전할 권리를 요구하고 행동하자. 우리가 달라진 만큼 사회와 국가도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태원참사 1주기를 보내고 세월호 10주기를 앞둔 우리 사회가 생명안전기본법 제정 운동을 통해 만들어가야 할 변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