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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인 인터뷰

[사랑방 30년, 질문을 엮다] ‘존엄’이라는 장미를 높이 들어 올리는 사랑방을 기대하는

채효정 님을 만났어요

2023년 3월, 인권운동사랑방이 30주년을 맞이합니다. 이에 <기꺼이 엮다 – 인권운동사랑방 30년>이라는 제목으로 30주년 기념사업을 진행하며, 사랑방의 30년을 ‘이야기를 엮다’, ‘질문을 엮다’, ‘시대를 엮다’는 주제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 중 ‘질문을 엮다’라는 기획으로, 한국 사회와 인권운동사랑방을 함께 돌아보는 채효정 님과의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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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제 페이스북 프로필에는 “영원한 바보”라고 되어 있어요. 뭐라고 소개해야 할까요? 강원도 인제에 살고 있고,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장이고, 연구도 하고 글도 쓰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기후정의 활동가로서 열심히 활동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일을 많이 하시는데요, 가장 자주 소개하게 되는 직함이 있을까요? ‘후마니타스칼리지 해고 강사’라는 소개를 자주 봤던 것 같은데요. 

지금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해고 강사’는 빼지 않고 써요. 왜냐하면, 나의 해고 투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나도 잊지 않고 또 사람들한테도 계속 말하기 위해서죠. 저에게는 그게 끝나지 않은 질문이거든요. 가능하면 늘 다른 직함과 함께 후마니타스칼리지 해고 강사를 꼭 넣어 달라고 해요. 그 이름이 저의 어떤 근거인 것 같아서요. 해고 투쟁이 저한테는 계기가 됐거든요. 다시 사회운동에 뛰어든 계기요.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고, 진보적인 발언을 하고, 그런 차원을 넘어서, 사회운동에 좀 더 깊숙이 개입하는 큰 계기가 됐기 때문이죠.

‘질문을 엮다’라는 제목으로 사랑방 운동을 돌아보면서 채효정 님을 인터뷰하면 좋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세상에 질문을 던지고 어떠한 입장을 세워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질문은 저한테도 항상 화두였어요. 학교에 있을 때도, 답을 가진 사람보다는 물음을 잃지 않는 사람이 되자고 학생들한테 얘기하고, 저한테도 항상 그랬거든요. 답을 찾는 게 아니라 지금 필요한 질문이 무엇이고, 그 물음이 어디서 지금 나타나고 있는지, 이렇게 ‘물음’을 찾는 게 저한테 더 중요해요. 그리고 어떤 일을 할 때도 그 물음이 확고하면 그게 동력이 되는 것 같아요. 요즘은 사람들이 “답이 있냐? 대안이 있냐?”라고 다그치는 시대고, 우리도 조바심을 내는데, 저는 그 답이 있을 때 보다는 내가 답해야 할 물음이 생겼을 때 힘이 나는 것 같아요.

사실 그렇게 질문을 던지는 게 마냥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질문을 만드는 것 자체가 쉽진 않은 일이죠. 저는 어떤 주장이나 설명에 대해서, 그게 스스로 납득이 안 될 때가 있어요. ‘나는 이게 100% 동의가 되지는 않아. 왜 그렇지?’ 그러면 저는 물어봤던 것 같아요. 90%를 동의할 수 있어도 10%가 납득이 안 되는 그 지점에 대해서. 그리고 그 10%의 질문을 채워가면서 하나의 입장이 만들어지는 거죠. 쟁점이 되는 사안들이 막 붙을 때는 계속 생각하고 근거를 찾고 판단하려고 노력해요. 나는 어떤 판단을 해야 하지, 왜 나는 동의가 안 되지, 이런 질문을 계속 찾고 답하려고 하다 보면 그게 조금씩 쌓이면서 질문도 선명해지고, 생각도 단단해지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건 개인적인 성향도 있겠지만, 90년대 이후로 운동이 이념적 지도나 좌표를 잃고 큰 사상체계가 무너지고 나서, 사건이 생길 때마다 그게 뭔지, 우리는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생각해야만 하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이런 습관이 만들어진 것이었죠.

활동가로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또는 어떤 운동이나 단체가 그런 역량을 키우기 위해서는 어떤 게 필요할까요? 

뾰족한 질문을 만드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그 질문을 던지는 것도 어떤 면에서 미움받을 용기도 필요하고, 부담도 되고 그런 일이죠. 저는 한국 운동 사회에 좋지 않은 태도가 있다고 생각해요. ‘남 욕할 시간에 우리나 잘하자’는 건데, ‘우리끼리는 욕하지 말자’는 정서가 각자 운동이 자기 운동에만 매몰되고, 상호 비판 능력을 상실하게 만든 한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운동 내부의 비판과 자정을 가로막는 데에도 기여했다고 생각하고요. 비판보다 긍정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게 더 낫다는 소위 ‘긍정론’은 듣기는 좋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돌아볼 수 있는 성찰의 계기를 계속 없애면서, 운동 사회를 무슨 대안 경연장이나 사교장처럼 만들어버리죠. ‘반정립이 아닌 정립의 문법’이란 표현도 ‘설득과 공감을 얻기엔 반정립(남 비판)보다 정립(우리 대안 제시)가 더 낫다’는 의미인데, 그럴듯하지만 저는 반정립이 낫다고 생각해요. 반정립은 차라리 대화잖아요. “너 왜 그래” 이렇게 상대를 붙들고 얘기하는 거지만, 소위 ‘정립’은 그냥 독백인 거죠. 근데 언젠가부터 한국 사회운동이 다 독백처럼 얘기하기 시작했어요. 동물권 활동가는 동물권, 인권 활동가는 인권, 교육운동은 교육이라고 하는 자기 의제에 갇혀서, 입장이 같은 사람들하고 같은 주장만 공유하고요. 요즘은 교차성에 대한 강조도 많이 나오지만, 교차성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 사실은 계속해서 간섭하면서 오늘 인터뷰 주제처럼 ‘엮어내는 것’인데, 엮이려고 하기보다 칸막이를 치는 거죠. 저도 부담을 느끼지만 그걸 좀 깨뜨리고 싶은 마음이에요. 비판을 안 하는 게 아니라 잘 하는 게 중요하고, 그런 훈련과 역량을 우리가 좀 더 길러야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성찰적인 사람들도 비판을 잘 못 하는데, 끊임없이 ‘나는 잘 하고 있나? 그런 자격이 있나?’하는 자기반성적 물음부터 먼저 던지니까, 남이 하는 일에 뭐라 하지 못하게 되기도 해요. 그럴 때 제가 쓰는 일종의 방법은, 말을 하고 그 말을 타인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시키자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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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운동부터 최근의 기후정의운동까지, 어떤 질문을 좇아 현재까지 왔는지 궁금합니다.

교육운동 하다 기후운동도 하고 그러고 있으니 사람들이 전공이 뭐냐고 묻기도 하는데요 ((웃음)), 그걸 모두 연결하는 하나의 열쇳말이 있다면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겠어요. 저는 급진 민주주의자거든요. 지금 민주주의가 형해화되어버린 시대잖아요. 그걸 위해 사람들이 목숨을 걸기도 했던, 정치적 지향과 이념으로서의 민주주의는 사라지고, 부르주아적 거버넌스나 포퓰리즘 정치와 구분도 안 되고, 문제투성이의 정치제도로 애물단지 취급만 받고 있죠. 기후정의운동에서도 기후위기와 민주주의 위기, 불평등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학벌없는사회’ 운동도 저에겐 엘리트주의, 소수의 지배에 대한 저항이었고요. 학벌을 위계 문화 같은 문화적 폐해로 보거나, 한국 사회의 사회적 병폐를 지적하는 운동은 아니었어요. 권력의 지배와 재생산에 대한 문제의식이 일차적이었던 거죠.

기후정의운동도 정치와 민주주의의 물음들이 빠져 있다는 문제의식이 되게 컸어요. 저는 생명이 너무 소중하고 지구를 지켜야 되고 이런 데서 출발한 게 아니에요. 그린뉴딜을 녹색당에서 총선 공약으로 채택할 때, 너무 이상하더라고요. 그때도 그린뉴딜 속에 동의 안 되는 10%가 있었어요. 그래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죠. 자료를 찾고, 근거를 추적해나가면서, 이런 정책이 여전히 소수의 전문가와 권력자, 자본가들, 즉 이 위기를 만든 장본인들에게 다시 권력을 주고 지구를 조작·관리·통치하는 주체로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리고 기후담론 속에서 삶을 박탈하고 생명 덩어리로만 살아있게 만드는 생명 정치의 문법을 발견했고요. 기후, 에너지 문제는 그간 저의 연구나 활동 분야는 아니지만 이 판에서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으니 저는 제가 공부한 정치학을 바탕으로 기후문제를 바라보고, 해석하고, 발언을 하기 시작했죠. 그러니까 저에겐 하나의 질문이 계속 있었어요. 소수의 지배에 대한 질문이죠. 

지금은 자본의 독재가 너무너무 막강해진 시대고, 그런 점에서 저는 계속 일관되게 독재와 과두정에 저항하는 민주주의자의 투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기후위기는 환경운동이나 에너지 문제라는 틀로 딱 좁힐 수 없는, 교육의 문제이기도 하고, 인권의 문제이기도 하고, 노동의 문제이기도 한, 이 모든 문제들을 동시에 드러내면서 응축된 구조적 모순이 폭발하는 지점이라고 봐요. 어떻게 보면 기후위기라고 하는 상황이 우리가 만들어내지 못한 전선, 만들어내야 했던 저항 전선을 만들어냈고, 저는 거기서 제가 설 자리를 또 찾은 것이죠. 

2017년 ‘사람과공감’에서 진행했던 강연에서 탄핵촛불 이후 한국 시민운동의 실패를 이야기하며, 이를 투항으로 진단하셨는데요. 당시의 고민을 현재로 가져온다면 어떤 이야기를 더 나눠볼 수 있을까요?

그때도, 지금도, 도취되지 않고 더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패배한 싸움은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 최선을 다해서 싸웠지만 어쩔 수 없이 패배한 거는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 씨앗을, 불꽃을 가슴에 품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줘버린 거는 되찾아오기가 힘들어요. 촛불은 줘버린 거예요. 자유주의 진영이 기득권 세력에게.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모처럼 분출된 사회변혁의 열망을 ‘체제 유지’를 위해 중재하면서 멈춰 세운 것이죠. 그때 ‘투항’이라 부른 것을 지금은 좀 더 정확하게 ‘자유주의 반동’이라고 표현하죠.

한국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자유주의 반동의 시기가 있어요. 유럽에서는 사민주의가 우경화하면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주도한 2000년대부터가 본격적인 자유주의 반동기라고 볼 수 있겠죠. 독일은 사민당-녹색당 연정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밀어붙였죠. 영국 블레어 노동당도 마찬가지구요. 80년대의 1기 신자유주의가 대처, 레이건 정부 같은 보수 정당들에 의해 추진된 전후의 노사 합의 체제에 대한 강력한 백래시였다면, 200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는 사민주의 정당들의 친자본 전향을 통한 자기배반적 반동이었어요. 한국 사회도 그렇게 진행이 됐는데 우리는 그걸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어요. 자유주의자들이 계속 진보를 참칭하고 있는 상황에서 촛불까지 왔던 거죠. 지배계급 내 균열을 포함하여 여러 우연적 사건들을 통해 촉발된 촛불 시위는 민중의 분노를 제대로 결집해내지 못하고 결국 ‘도둑맞은 혁명’이 되고 만 거죠. 그때 이후로 노동자들의 상황과 사회운동 지형이 굉장히 안 좋아졌죠. 

자유주의 담론은 저에게 가장 큰 숙제고 넘어서야 할 과제예요. 변혁적 사회운동에서도 자유주의 담론을 극복하는 대항 담론을 만들어내는 게 시급하다고 보고요. 제가 계속 그걸 강조하는 이유는, 지금 민주당이나 자유주의자들이 하는 짓이 너무 꼴 보기 싫다, 그런 차원이 아니라, 지금 정세가 ‘자유주의 반동기’이고 이는 ‘보수주의 반동기’보다 훨씬 위험하기 때문이에요. 1930년대, 자유주의 부르주아와 사민주의 정치세력이 전쟁을 일으킨 구 기득권층과 자본가 세력과 타협하면서 좌파를 청산하고 노동운동을 탄압했던 유럽 정치의 역사가 이를 보여줍니다. 그다음에 들어선 게 파시즘이죠. 한국에선 노무현과 문재인의 ‘삼성 연정’이 딱 그랬고, 근래에는 조국 사태가 자유주의 반동을 분명히 보여준 사례죠.

당시 강연에서 시민사회운동의 문제를 짚으면서, 사람을 조직하고, 사업이 아닌 운동을 해야 하며, 노동과 연결되어야 한다고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이 민주당에 등을 돌렸잖아요. 대중들은 자유주의 세력의 실체에 대해서 알았어요. 그런데 진보정당들과 시민운동은 계속 그 외곽 언저리에서 뭔가를 해보려고 하면 똑같아 보이죠. 그러면 사람들이 갈 곳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명확하게 선을 그어야 해요. 운동의 전망을 제도권에서 뭔가를 해보려는 것으로만 가두니까, 민주당과 선을 긋지 못하는 것 같아요. 체제 밖으로, 제도 밖으로 탈주하면서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공간이 생기는 거죠. 그러려면 운동은 다시 파편화되어 흩어진 그 ‘바깥의 사람들’을 조직하고, 사업이 아니라 운동을 해야 하고, 시민운동이 중산층 생활운동의 공간으로 머무르지 않으려면 노동계급과 긴밀히 연결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던 것이죠. 그 얘기를 계속 해야 돼요. 우리는 어떤 사회에 살고 싶고 어떤 삶을 원하는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근데 그걸 누구의 목소리로 말하느냐가 중요한 거죠. 시민사회운동이 진보적 시민, 진보적 정치의 아젠다를 대중에게 전달하느냐, 아니면 억압받는 노동자, 민중의 목소리를 사회와 정치를 향해 전달하는 창구가 되느냐. 

사회 전체가 요동치는 상황, 위기를 모두가 느끼는 상황에서 ‘정말 이렇게 살 수 있어? 이렇게 사는 게 맞아?’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말이네요.

그 질문은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못 살겠다”며 던지고 있는 질문이죠. 그게 정치의 언어로 모이거나 공동 의제로 만들어지지 않고 있는 게 문제예요. ‘천공’ 뉴스 같은 것들이 진짜 중요한 이야기들을 다 누락시키고 있는 게 현실인데, 그러면 진보운동, 좌파운동이 그걸 띄워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답답하죠.
사람들 사이에서도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위기의식이 고조되고는 있지만, 너무 경제적 위기에만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는 것도 문제예요. 제가 우려하는 점은 정치적 위기예요. 지금은 각자 다들 너무 바쁘고, 너무 힘들어요. 내 앞가림하기도 힘들고요. 대출금, 주거문제, 직장 등 개인의 삶으로 닥쳐오는 어려움이 너무 많고요. 그러니 사회나 정치를 돌아보지 못하죠. 그 결과 그보다 훨씬 더 큰 위협으로 다가오는 정치적 위기에 대한 분석이나 경고가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윤석열 정부에 대해서만 해도 정치체제에 대한 구조적 위험성을 말하기보다는 그냥 개인을 보고 한탄하거나, 우습게 보고 희화화시키기만 하잖아요.

이때 정치적 위기라는 건 무엇일까요?

파시즘이죠. 지금 파시즘은 2차 대전 시기의 파시즘에서 훨씬 정교하게 진화한 다른 유형의, 자본의 독재이자 시장의 파시즘이라고 할 수 있어요. 직접적인 폭력은 줄어든 것처럼 보이지만 구매력 없는 사람들을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하고 배제하는, 은밀하고 정교한 구조적 폭력이 훨씬 더 강해진 형태예요. 게다가 경제위기, 기후위기와 같은 위기는 각자도생의 사회, 정치적 부족주의를 강화해요. 2차 대전 이후 서구 자본주의 국가에서 자본이 일정하게 노동계급과 타협하는 양상이 나타났던 건, 자연에 대한 수탈과 새로운 식민지화 등으로 외부착취를 통해 내부의 개량을 할 수 있는 타협의 여지가 있었기 때문인데, 지금은 그 어디에도 ‘여지’가 전혀 없는 상황이죠. 노동도 자본도 착취한계에 도달했고, 자연도 기후위기가 보여주듯이 수탈의 임계점에 와있는 상황이니까요. 경제 호황기에 가능했던 분배나 타협의 조건이 모두 작동하지 않는 시점에서 자본은 민중을 상대로 한 전쟁을 선포해야 하는 상황인 거죠. 그건 국내적으로는 폭력의 강도가, 국제적으로는 전쟁의 위기가 계속 고조될 것이라는 뜻이에요.

그래도 희망은 이렇게 암울한 상황에서도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주체가 등장한다는 거예요. 너무 신기하지 않아요? 대체 어디서 나타나는지,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건지 저도 너무 궁금합니다. 2017년 강연 때도 저는 지금 기후정의동맹으로 모인 이런 주체들이 형성되고 나타날 거라는 건 생각지도 못했어요. 되게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했었죠. 

최근 전기, 가스 요금이 급등하는 국면에서도 한전과 가스공사 적자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서라도 요금인상이 불가피하고 취약계층은 에너지 바우처를 주면 된다는 주장을 당당히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놀랐습니다. 

저는 그런 접근이 되게 굴욕적으로 느껴지는 거예요. 에너지 주권을 빼앗고, 바우처를 주겠다는 건데, 그게 바로 토지를 빼앗고 빵을 주겠다는 논리죠. 저는 지원금 액수나 방식에 한정된 논쟁이 아니라 저런 논리 자체를 깨트리고 싶은 것이죠. 그게 용납이 안 되는 거니까. 게다가 적자를 인상 이유로 대는 건 결국 기업의 회생을 위해 국민이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인데, 그거 IMF 때 한번 속아봤던 거잖아요. 국민이 적자를 메워주면, 주주에게 수익 배당하는 주식회사가 아니라 국유 기업으로 만들어야죠. 이익은 사유화하고 비용은 사회화하는 저런 논리를 수용해주면 안 되는 거예요. 에너지 요금은 인상해야 하는데 정치인들이 국민들 눈치 보며 주저하니까, 그런 양상을 포퓰리즘 정치로 공격하면서 가격이 정치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에너지 가격 위원회’ 같은 것을 별도로 만들어 정치과정에서 독립적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도 들리는데, 그럼 시민이 입법권을 통해서라도 제한적이나마 개입하고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여지가 완전히 없어지는 거잖아요. 그건 에너지 자본과 금융엘리트에게 우리의 주권을 내맡기고 시장의 논리로 사회를 설계하겠다는 것이에요. 그게 바로 정치를 없애는 현대의 파시즘이라고 생각합니다. 

화제를 조금 돌려서 인권운동사랑방과의 인연이 궁금합니다.

인권운동사랑방은 워낙 유명한 단체니까, 어떻게 알게 됐는지도 모를 만큼 그냥 자연스럽게 알고 있던 단체였죠. 저는 후원은 되게 늦게 시작했는데 2020년에 후원인 모집사업을 한다는 것을 보고 하게 됐어요. 그 뒤에 사랑방 소식지나 <인권으로 읽는 세상>을 읽으면서 이런 단체는 잘 돼야 한다는 생각으로, 더 엮여야겠다는 마음으로 후원을 한 거죠. 그런데 탄중위 해체 공대위, 기후정의동맹 활동에 참여하면서 보니 사랑방 활동가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더라고요. 깜짝 놀랐죠. 이렇게 많은 역량을 투여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말이죠. 가까이서 보면 볼수록 기꺼이 엮일 만한 존경스러운 단체입니다.^^

과거에는 사랑방이 어떤 이미지였나요?

밖에서 볼 때는 아주 사회 변혁적인 단체처럼 보이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저도 오랫동안 익숙한 단체지만 후원을 늦게 시작한 것도, 호감과 호의가 지지로 전환되는데 시간이 걸렸던 것 같구요. 기후정의운동을 함께 하면서 그 색깔이 저에겐 점점 붉어지고 더 선명해졌어요. 처음에 기후위기 관련해서 정록 활동가가 쓴 글을 읽었을 때 정말 반갑고 고마웠죠. 그때는 그런 의견이 소수였고 귀한 입장이었어요. 근데 인권운동사랑방에서 이런 관점에서, 이런 각도에서 접근을 하고 쓰는구나, 이런 활동가가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사랑방에 대한 이미지도 다르게 보게 됐어요. 그리고 제가 갖고 있던 인권운동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좁은 시야도 더 넓혀주게 하는 계기가 됐어요.

인권운동에 대해서도 저는 10%의 의문점이 계속 있었거든요. 90% 동의하지만 너무 당연해서 동의할 수밖에 없는 부분 외에, 너무 보편적이어서 오히려 탈계급화·탈정치화 되기 쉬운 게 또 인권이기도 하니까, 어떻게 하면 잘 가를 수 있을까. 그런 회의와 고민이 있었고, 인권을 말하면서도 사적 권리 주체를 강화하는 방식은 아니어야 하는데, 권리를 개인의 권리로 계속 환원시키는 자유주의 인권 담론에 대한 문제의식 같은 것도 있었죠. 사랑방이 인권운동의 다른 지평을 보여주게 된 계기가 됐어요. 

30주년을 맞이한 인권운동사랑방에 후원인으로서, 또 기후정의활동가로서 사랑방에 기대하는 바가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지금 주류담론은 점점 더 경제주의, 시장주의, 기술주의에 경도되어가고 있고, 정치적 관점이 너무 부재하다는 생각이에요. ‘빵과 장미’라는 상징으로 말해보자면, 우리는 빵도 필요하지만 장미도 필요한데 지금 위기 담론 속에는 장미가 너무 없어요. 사랑방이 그 장미를 지켰으면 해요. 우리는 존엄을 위해서 싸우는데 기후 문제에서도 생존의 위기만 강조되는 상황에서, 존엄을 계속 상기시켜주고 중심에서 잊히지 않게 해주는 그런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어요.

예를 들어, 일자리 대책을 논의할 때 없어지는 일자리만큼 만들어내면 된다는 식의 접근법이 있잖아요. 저는 그런 관점이 너무 싫거든요. 발전 비정규직 노동자가 ‘우리가 레고 블록이냐’는 말을 하더군요. 좋은 일자리 뺏고 나쁜 일자리 주는 것도 문제지만, 근본적으로 그건 토지를 빼앗고 빵을 나눠주면서 굴종을 요구하는 것이죠. 그래서 기후정의운동은 ‘정의로운 전환’을 강조한 건데, 경제주의·자유주의적 문법은 그 의미를 자꾸 보상이나 시혜로 변질시키죠. 그때마다 사랑방이 계속 그것은 정의로운가, 평등한가, 존엄한가를 묻는 깃발이 되어주길 바랍니다. 사랑방이 존엄이라는 장미, 자꾸만 후순위로 밀리는 장미를 더 높이 들어 올려주길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