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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이야기

우리 앞에 열린 평등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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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그램 디지털 성범죄 해결, 4.16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사회적참사특별법 개정,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비롯한 전태일3법, 낙태죄 폐지와 재생산권 보장…. ‘차별금지법 제정하자! 10만행동’ 국민동의청원을 시작하기로 결정하고 난 이후, 10만 명의 동의를 얻어 국회에 회부된 지난 국민동의청원들을 살펴보며 머릿속이 아득해지던 때가 있었다. 그저 많은 수의 사람들이 동의하고 지지했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한국사회를 뒤흔들었던 의제들처럼 차별금지법의 의미를 사회적으로 알려낼 수 있을까?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는 10만 명의 사람들을 모아보자고, 그 사람들과 함께 우리 스스로 차별금지법이 멈춰 서 있는 현재의 지형을 바꾸어내자고 결심했지만, 불안한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물론 한 동료는 ‘10만행동은 될 수밖에 없어, 이건 되는 운동이야.’ 자신했지만… 나는 쪼끔 더 소심했다.) 하지만 저 멀리 가물가물해 보이는 전망을 10만 명의 사람들이 또렷하게 만들어가며, 차별금지법 제정에 관한 국민동의청원은 시작 22일 만에 10만 명의 동의를 얻어 국회에 회부되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여서 할 수 있었던 일

‘한 걸음 더 움직이게 하는 것이 어렵다.’

지난 3월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전국활동가 시국회의에서 한 참가자가 남긴 말을 다시 떠올린다. 그렇다. 일상적으로 차별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다수라고 할지라도, 한국사회에 평등을 선언하고 차별을 규율할 수 있는 법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수라고 할지라도, 한 걸음을 ‘더’ 내딛게 하는 흐름을 만드는 일은 쉽지 않다. 10만행동은 국민동의청원이라는 공적 제도를 통해서 자신의 요구를 드러내는 것뿐만 아니라, 먼저 나선 그 개개인들이 자신의 친구, 가족, 이웃과 동료시민들에게 ‘함께 하자’고 제안하는 적극적인 발걸음 없이 성사될 수 없기 때문에. 22일의 시간은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열망을 어떻게 끊이지 않는 발걸음으로 이어지게 할 것인지를 고민해온 시간과 맞닿아 있다.

10만행동 역시 혼자가 아니라 함께여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10만행동 성사를 위해 꾸려진 상황실은 매일 밤 불이 꺼지지 않았고,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소속단위들을 비롯해 인권시민사회단체와 다양한 노조 단위들로 폭넓게 조직된 확대상황실 회의는 매주 목표와 전략을 함께 점검하고 논의해나갔다. 단체들마다 각자 회원 및 후원인들을 대상으로 한 계획을 세우고, 문자와 이메일, SNS로 소식을 전하고, 먼저 나선 시민들과 함께 거리와 광장에서 피켓을 들고 섰다. 10만행동을 알리고 싶은 사람들이 모인 오픈카톡방에서는 더 이상 참여를 권유할 지인이 없는데 어디에 홍보하면 좋을지 서로 의견을 나누는 사람들, 껄끄러워서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던 가족이나 직장동료에게도 용기내서 권유했다는 사람들, 삭제될 수도 있지만 ‘애브리타임’(대학생 커뮤니티 앱)에도 올리고 왔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10만행동 달성은 국민동의청원 소식을 몰라서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도록 하고 싶은 마음, 내 곁에 함께 서 있는 중요한 타인들이 함께 지지해줬으면 하는 마음, 이번에야 말로 우리의 결집된 목소리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마음들이 촘촘히 쌓인 결과다.

평등의 약속, 차별금지법을 만들어가는 힘

일주일 만에 5만 명을 달성할 수 있었던 힘, (중간에 정체되어 있던 시간을 거쳐서) 마지막 2만 여명을 남겨두고 주말부터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10만 명이 채워졌던 과정을 떠올린다. 그러다 처음의 불안한 마음을 딛고 이제 우리가 어떤 달라진 지형 위에 서 있게 되었는지를 깨닫는다.

‘차별금지법이 정말로 한국사회에서 인권과 민주주의를 판가름하는 사회적 의제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 같아.’ 한 친구의 말처럼 나 역시 10만행동 과정이 한국사회에서 차별금지법이 중요한 의제로 본격적으로 자리 잡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언론도 연일 차별금지법으로 뜨거웠고, 이상민 의원의 평등법안 대표발의를 계기로 더불어민주당도 제정을 위한 움직임을 보이면서 ‘정말 제정의 가능성이 열리려나보다’ 기대를 갖게 된 사람들 또한 적지 않다.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길이 새롭게 열렸다는 것 자체로 마음이 벅차다. 하지만 10만행동의 벅찬 마음은 ‘우리가 함께 해냈다’는 경험을 만들어냈다는 것, ‘우리가 함께 제정할 수 있다’는 전망을 갖게 하는 자부심을 공유하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도대체 제정될 수 있기는 한 건가?’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의심을 뒤로 하고, 이제 우리는 우리의 힘이 무엇인지를 또렷하게 목도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국회가 차별금지법에 대해 거부, 유예, 침묵할 수 없다며 ‘이제 국회의 시간’이라고 외쳤지만, 그건 차별금지법의 제정이 온전히 국회의 책임에 달려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제 국회의 시간’은 이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차별금지법의 제정을 위해 국회를 움직이게 할 또 다른 시민행동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저 현재의 상황이 좋아지기만을 기다리지 않는, 바로 우리가 원하는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선언하고 움직이는 사람들의 시간도 함께 열렸다. 2021년 차별금지법 제정까지, 다시 숨가쁘게 움직이고 모여야 할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