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 페퍼, 『남한 북한』, 모색, 2005.3.7, 298쪽 ♠
무엇보다 지은이와 책에 대한 소개가 눈길을 끌었다. “미국에서는 드물게 보는 진보적 시각으로 한반도 문제와 미국 정부의 외교정책에 대해서 연구하는 외교정책 전문가”, “그는 북한을 세 번 그리고 남한을 24번 이상 방문했다. 그 결과로 출간된 이 책 『남한 북한』”. 나는 일단 한반도 문제에 대해 제3자적 시각이 어떨지 궁금했다. 특히 이 책은 북에 적대적인 미국 안에서 형성된 진보적 시각이기 때문에, 보다 더 객관적인 관점을 제공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실제 이 책은 ‘북한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세간의 인식에 의문을 표시한다. 한반도의 역사, 공산주의 체제, 그리고 동아시아 사회라는 “세 문구를 나란히 놓고 생각해 보면, (북이) 특별히 이상하다고 여길만한 요소들은 대폭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북 정부의 ‘불합리성’과 관련해서는 “남한 북한을 둘러볼 때, 만일 서울을 먼저 방문해서 경제적 교역과 남한의 중앙권력의 집중이 어느 정도인지를 주의 깊게 보게 되면, 평양 여행이 좀더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평한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북만큼 남도 불합리하게 보인다는 것이고, 이를 역으로 말하면 남만큼 북도 합리적이라는 뜻이 된다.
또 이 책은 곳곳에서 남 사회의 주류적 상식에 딴지를 걸거나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한반도의 분단은 패전국 독일에게 강요된 분단과는 달리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었을 뿐더러 부적절하기까지 했다는 사실, 북이 남을 공격하면서 시작된 6.25전쟁 훨씬 이전부터 남북 국경분쟁이 있었고 이 시기 중요한 전투들은 대부분 남에서 도발한 것이라는 사실, 북 정권 초창기에는 소련과 중국의 꼭두각시 정권으로 묘사되나 정작 김일성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 등이 그것이다.
이 책의 탁월한 점은 두 가지 모순에 대해 해설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북한이 더 활발하게 외부 세계와 접촉을 시도하려던 바로 그때 왜 고립의 심화로 이어졌는가”이며, 다른 하나는 “북한을 좀더 충분히 국제사회로 편입시킬 수 있었고 그에 따라 평양에 시장경제를 장려할 수 있었던 미국이 왜 북한을 자신들의 가장 오랜 적대국으로 고립시키기를 계속하는지”이다. 익히 알다시피 전자의 모순은 북의 핵 문제와 관련이 있고, 후자의 문제에는 미국의 적대적인 대북정책이 있다.
북의 핵 문제와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은 동전의 양면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북이 핵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에 미국이 적대정책을 취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적대정책 때문에 북이 핵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을지, 아니면 단지 핵무기를 만들기 위한 핵 재료만 가지고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어쨌든, 전세계가 북한에 사용 가능한 핵 무기가 있다고 믿는다는 가정 하에, 북한은 그들의 목표인 미국의 북폭 저지를 효과적으로 얻어내고 있다.”
비록 북이 6.25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었지만, 지금은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은커녕 남을 상대로도 전쟁을 일으킬 능력이 없어 보인다. 남보다 경제규모가 26배나 작기 때문이다. 북의 군인 1인당 지출비용은 남의 1/10 정도이며, 북 정부의 예산 총액은 남의 군 예산보다 수십억 달러가 적은 수준이다. “북한의 1년 군대 예산인 14억 달러로는 B-2 폭격기 한 대조차 살 수 없다”고 한다. 또 북 군대의 기술력은 구식이며, 따라서 북의 미사일 계획은 “솔직히 말해 기술적으로 의심스럽고 군용 목적이라기보다는 협상 수단으로 더 유용한 편”이라는 것이다.
한편 이 책을 읽으면 북이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로 핵을 택할 수밖에 없는 배경에 대해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미국에 대해 북이 느끼는 ‘두려움’이다. 미국의 대북정책은 크게 세 가지 축으로 이루어진다. 군사봉쇄, 경제적 고립, 그리고 정권교체. 즉 미국은 비둘기파든 매파든 궁극적으로는 북의 정권교체를 바란다.
다만 북의 정권교체를 얼마만큼 정책의 우선순위에 놓느냐에 따라 비둘기파와 매파는 나뉜다.
“북한의 핵 계획을 외교적으로 풀기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을 경제적, 군사적으로 고립시키는 냉전 정책을 유지했다. 또, 보수주의자들이 대북정책의 궁극적인 목표를 평양의 정권 교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도 기본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 북한에 대한 공포와 불신을 디딤돌로 삼아, 조지 W. 부시는 외교적인 허식을 벗어던지고, 평양 정부를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 관점에 서서, 북한의 정권 교체를 미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올려놓았다.”
이를 이 책에서는 ‘포함 외교’라 부른다. 원래 포함 외교란 19세기 서구 열강등이 아시아 제국에 대해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려는 목적으로 포함을 보낸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1966년 미국은 제너럴 셔먼호를 대동강으로 보내 한국에 대해 소위 ‘포함 외교’를 시도하였다. 21세기의 포함 외교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특정 경제 및 정치 구조를 채택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다. 몇몇 국가들이 ‘포함’을 공급하고 다수 참여자들이 ‘세계화’를 수행한다는 차원에서 이를 ‘포함의 세계화’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책은 어떻게 ‘평화로 가는 길’을 만들지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다. “양국(북과 미국) 모두 태도 변화를 보여야 한다. 국제적인 노력을 기울여 양국이 외교적 수단을 이용하도록 설득하고 자극하며 그렇게 하도록 부추겨야 한다. 북한이나 미국 모두 정권이 바뀌지 않는 한 상대방을 믿기는 어려울 것 같다. 상대방을 믿는다는 전제 하에서만 체재협정을 부활시킬 수 있다. 하지만 동아시아 국가들이 집중적인 관심을 보인다면 양국 강경론자들의 기세를 꺽고 협상 테이블에 앉아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특히 ‘한반도의 미래를 위한 특별한 제안’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동아시아 비핵지대라는 맥락에서 “한반도 비핵화”이고, 다자간 안조 체제의 계류점이면서 동시에 이 지역 경제 구역에서 잃어버린 고리와 같은 역할로서 “한반도 중립화”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민 스스로 민족의 미래에 대한 주도권을 갖게 된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한국민은 아시아 중심부에 뚫려 있는 구멍을 메우면서 분할된 동아시아 지역을 새로운 경제 및 정치의 중심지로 만들 능력이 있다”고 격려하면서 이 책은 끝을 맺는다.
이 책은 자칫 남쪽의 시각과 문제로 협소하게 이해할 수 있는 남북미 관계에 대해 풍부한 상식을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상식의 넓이만큼 성찰의 깊이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이다. 책이 한(韓)민족의 정서를 관통하는 열쇳말로 ‘한(恨)’을 이야기하면서 개괄한 한국의 근현대사는 제3국에서는 특별한 것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1987년 KAL기 폭파 사건에 대해 북의 소행이라고 단정한 것도, 오늘날 실종자 가족들로부터 진상규명 요구가 거세게 일고 있는 사실을 반영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외신기자가 밝힌 노근리 사건에 대해서만 언급한 것도, 최근 남의 민간단체가 밝힌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사건 중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유추하면 북에 대해 언급한 정보도 그다지 깊이있는 것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가능할 것이다.
이 책이 발간된 이후인 지난달 제4차 6자회담 공동선언이 합의됐다. 어떻게 보면 책에서 전망한 대로 한반도 문제에 대한 국제적인 노력이 양국 모두의 태도 변화를 이끌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한국민 스스로 민족의 미래에 대한 주도권을 갖게 될 날도 어느 순간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지 않을까? 미 진보주의자의 시각으로 한반도 문제를 엿보는 것도 때로는 필요한 일이 아닐까 한다. □